1. 한 고대 문서 이야기

여기 한 고대 문서가 있습니다.

2,000년 전 기록된 문서가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보존될 수 있을까요? 2,000년 전 33년 동안 살았던 한 인물이 어떻게 인류의 역사 전체를 완전히 뒤바꿀 수 있었을까요? 2,000 년 전 쓰여진 고대 문서에서 다룬 예언과, 지금 성취되고 있는 예언, 앞으로의 예언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이 고대 문서와 이 인물은 누구일까요?

2. 불편한 진실

2.1. 너무나 위험한 도박


여러분이 식당에서 물을 마시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선생님, 그 물에는 치명적인 독약이 섞여 있으니 절대로 마시지 마십시오!

라고 얘기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이 사람의 말은 거짓이라고 생각하여 벌컥벌컥 마시겠습니까? 이 사람의 말이 아무리 믿기지 않아도 여러분은 함부로 그 물을 마시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물을 마셨는데 그 사람의 말이 사실로 판명된 경우, 여러분은 그 사람의 말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은 이유 때문에 죽음이라는 너무나 끔찍한 결과를 맞게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부터 이 문서를 통해 여러분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 문제는 여러분의 선택에 따라 영원한 기쁨이냐 너무도 끔찍한 영원한 고통이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얼핏 아무리 황당하게 여겨지거나 믿기지 않아도, 이 문제가 정말 사실인지 심각하게 한 번 쯤은 고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단순히 그럴리가 없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기에는 너무나 큰 도박 아닙니까? 혹시라도 여러분이 지금까지 이 문제를 흘려들으셨다면, '불편한 진실’에 대해서 진지하게 따져보시기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2.2. 불편한 진실

지금부터 그 '불편한 진실’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저도 마찬가지이고,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한 번 태어난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으면 그 이후에는 아무런 세상도 없고, '나’라는 존재도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여러분도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고 꿈꾸는 삶을 추구하며 즐겁게 살다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브리서 9:27)

그렇다면, 그 이후에는 어떤 결과가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믿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거룩한 삶을 산 사람들은 영원히 천국에서 무한한 기쁨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고 부인하거나 자신의 욕망에만 사로 잡혀서 인생을 산 사람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불 속에서 영원한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여러분, 천국과 지옥은 종교적인 환상의 산물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고 느끼고, 존재하는 이 세상과 똑같이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우주 만물과 인간을 창조했을 때에는 인간은 이 지상에서 영원한 기쁨을 누리면서 살도록 계획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과 악을 택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범함으로써, 인간은 '죄의 결과’인 사망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런 이유로 하나님의 속성상 타락한 천사인 사탄을 위해 준비된 고통의 장소인 '지옥’의 영원한 형벌 또한 사람이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류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셔서, 자신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게 하시고, 예수님은 3일만에 부활함으로써 인류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이로써 그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죄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거룩한 삶을 산 사람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거나 자신의 욕심만을 추구하며 산 사람은 죽음 이후에 영원한 지옥 형벌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지옥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만큼 뜨거운 유황불로 사람을 태우면서 영원토록 고문하는 무시무시한 장소입니다. 지옥의 고통은 무한대이며, 너무나 절망적인 사실은 그 고통이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지옥은 ‘절망’ 그 자체입니다.

설령, 여러분이 아무리 선하게 살아도, 아무리 주변 사람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며 성자같은 삶을 산다고 해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결코 지옥 형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시간이 없습니다. 사람의 인생은 1분 1초 후의 일도 알지 못합니다. 지체하지 말고 지금 당장 그동안 지었던 모든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영접하여 믿고, 그 분이 원하는 거룩한 삶을 사십시오. 바로 이것이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었던 '불편한 진실’이며,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여러분, 거듭 강조합니다. 천국과 지옥은 ‘실제로,’‘진짜로’ 존재합니다. 그냥 사람들이 꾸며낸 종교적인 허상이나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지금 바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여러분의 구세주이자 삶의 주인으로 영접하시고, 그 분이 원하는 거룩한 삶을 사십시오!

2.3. 객관적인 증거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여러분은 아마 이런 반응을 보이실 지 모르겠습니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군

하나님, 예수님을 논하기 전에, 우선 신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검증하고 증거를 얘기해줘야 할 것 아닌가? 과학적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도 없는데 대체 무슨 근거로 신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인가?

예수, 부활, 천지 창조, 처녀의 임신으로 예수를 낳은 것,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 물위를 걷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5000명을 먹인 것, 십자가의 죽음과 3일 만의 부활과 승천, 진화론과 배치되는 비과학적인 창조론 등 너무나 비상식적이고 비과학적인 내용으로 점철된 종교적인 신화를 무슨 근거로 믿으라는 것이냐?

성경도 사람이 만들어낸 수많은 종교 경전의 하나에 불과한 것 아닌가? 그냥 기독교라는 종교를 만들기 위해 조작하고 편집한 역사적 픽션 아닌가? 예수님은 '종교’와 '현실’을 구분 못하는 광신도들이나 믿는 것 아닌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도 않은 신의 존재를 대체 무슨 근거로 믿을 수 있는가?

하나님이 공의롭다면 어떻게 이 세상의 불합리와 고통, 악이 존재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정말로 사랑이 넘치는 존재라면 어떻게 인간을 그토록 무자비한 지옥에서 영원히 고문을 할 수가 있는가? 지옥이 존재한다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므로, 그런 신은 존재할 수가 없다.

여러분이 위와 같은 의문이나 고민 없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시고 그 분의 뜻대로 살기로 결심하셨다면, 더 이상 이 문서의 자질구레한 변증이 필요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도저히 해결되지 않는 위와 같은 의문 때문에 믿기를 주저하셨거나, 기독교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면, 절대로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말고 왜 성경과 복음, 하나님이 진리인지를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이 믿겨지지 않는 신화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시각으로 '과연 복음이 사실인가’에 대해서 치밀하게 의심하고 따져보기를 원합니다.

혹시, 여러분이 골치 아픈 종교 얘기에는 관심이 없으니 그냥 넘어가려고 하십니까? 그새 잊으셨습니까? 지금 저는 여러분에게 치명적인 독이 든 물을 마시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여러분은 단순히 믿기지 않는다는 이유로 제대로 검증해보지도 않고 독이 든 물을 겁도 없이 마시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불편한 진실이 정말 사실인지 아니면 종교적 신화로 점철된 허구의 산물인지 지금부터 하나씩 확인해보겠습니다.

3. 당신이 복음을 부정하는 이유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은 '회의론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십자가의 대속 사역과 부활이 종교적인 허상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구원의 길’을 열어놓았다는 복음을, 도저히 믿기 어렵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혹은, 여러분이 이 사실을 믿고는 싶지만 너무나 비상식적인 이야기 투성이어서 믿기 어렵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처럼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믿음의 근거’를 확인하고 믿으려는 시도가 불경스럽거나 무의미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이러한 의심과 치밀한 검증을 통해 얻어진 믿음은 순간적인 감정에 의해 맹목적으로 믿는 것보다 훨씬 더 이성적이고 견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저는 여러분이 복음을 믿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여러분과 똑같은 회의론자의 시각에서 하나하나 따져보려고 합니다. 복음이 단순한 종교적 판타지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언뜻 받아들이기는 어렵지만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진실인지에 대해서 지금부터 치밀하게 검증해보고자 합니다.

3.1. 당신이 복음을 부정하는 이유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요약해보면 크게 다음과 같이 구분됩니다. 아마 여러분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도 대부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1. 신은 존재하는가? 신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이 가능한가?

2. 비상식적이고 초자연적인 기적, 과연 가능한가?

3. 성경의 본질과 역사성에 대한 의문

4. 생명의 기원과 진화에 관한 비과학성

원시 대기를 재료로 전기적인 자극이 가해져 우연히 생명체의 구성성분인 아미노산이 형성되었고, 이들이 조합되어 원시적인 생명체가 출현했다. 이들이 끝없는 진화를 통해 각종 생물이 나타났고 사람도 이러한 진화 과정의 산물이다.

5.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모순

3.2. 합리적인 의심

여러분이 이 모든 의문에 명백한 답을 해야만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하지만, 이러한 장애물 때문에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 반드시 이 장애물을 넘어서야만 합니다.

지금부터는 과연 이러한 의문이 정말로 타당한 것인지 하나씩 확인해보겠습니다. 우선 신은 과연 존재하는지부터 알아봅시다.

4. 신은 존재하는가?

4.1. 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

'하나님은 존재하며,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당신은 천국에 간다’는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판정하기 전에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할 문제는, 바로 '신이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의 여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모든 부차적인 논쟁이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5가지 체계적인 단계를 통해 신의 존재 여부를 검증해보려 합니다. 굳이 이 주제를 '단계’를 나누어 접근하고자 하는 이유는, 명확한 단계와 논리적인 검증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너무나 많은 궤변으로 얼룩진 소모적인 논쟁으로 끝나기 쉽기 때문입니다.

5단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무신론자 궤변의 문제점 확인
  2. 신의 존재를 합리적으로 증명하기 위한 올바른 논증 방법 제시
  3. 신 존재의 증거 논증 - 연역적 논리에 의한 우주론적 논증
  4. 신 존재의 증거 논증 - 가설 검증에 의한 귀납적 논증
  5. 신의 실재를 뒷받침하는 실제 증거들 확인

4.2. 무신론자의 궤변

여러분은 무신론 vs 유신론의 논증에서 아무리 많은 객관적인 증거들을 서로 제시함에도 불구하고 논쟁이 결코 끝나지 않는 공방전으로 끝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핵심적인 이유는, 논증과 논리에 오류가 있기 때문입니다. 객관적인 증거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증거를 바탕으로 한 논증과 논리 자체에 오류가 있다면, 아무리 증거가 사실적이어도 그 논증의 결론은 오류 투성이가 되겠지요?

바로 이것 때문에, 유신론과 무신론에서 끝없는 논쟁만 양산될 뿐 합리적인 결론이 도출되지 않는 것입니다.

궤변론자들이 주장하는 대표적인 잘못된 논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논리가 오류인 이유는, 인간의 이성은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앞으로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논리적인 보장은 없습니다.

두 번째 논리가 오류인 이유는, 과학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현상은 지금도 분명히 ‘과학적으로 관찰’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 이유를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소위 말하는 ‘초자연적 현상,’ ‘미스테리’ 같은 현상들입니다.

물론 이런 현상들 중 잘못된 오해나 실수에서 비롯된 경우도 많고,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게 된 경우도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과학으로 밝혀지지 않은 현상들이 미래에는 ‘반드시’ 과학으로 밝혀질 것이라는 보장은 당연히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과학은 어디까지나 ‘물리적 현상’ 만을 설명할 수 있을 뿐, 비물리적인 속성은 설명할 수 없다는 한계점도 가지고 있습니다.

비물리적 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현상은 거짓이라는 주장은 논리적 오류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주장은 얼핏 보면 상당히 ‘과학적’ 으로 들리지만, 사실은 매우 비합리적입니다.

세 번째 논리가 오류인 이유는, 우리가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합리적인 근거로 사실이라고 신뢰할 수 있는 현상도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아래와 같은 것이 대표적인 무신론자의 억지주장입니다.

신이 있다는 과학적인 직접적인 증거를 대 봐라.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직접적인 방법’도 없는데 어떻게 신이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있냐? 신이 우주를 창조하는 과정을 물리 방정식으로 증명하거나, 물리 법칙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해 봐! 증명 못하지? 그러니까 신은 존재하지 않아!

물론 신이 존재한다는 간접적인 과학적 증거는 존재하고,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이후의 글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습니다만, 신이 온 우주를 창조하는 과정을 직접적인 물리 방정식이나 입증하거나, 여러분의 눈에 보이거나 경험할 수 있을 정도로 체험시킬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 2차 세계 대전은 역사적 사실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2차대전의 진위성을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지요?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렇게 얘기한다고 가정해봅시다.

2차 대전은 발발하지 않았어. 2차 대전이 실제로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잖아? 타임머신을 타고 1940년으로 돌아가서 직접 내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없잖아?

우리는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미쳤다고 합니다.

이런 논리의 문제점이 무엇일까요? 어떤 사실을 직접적이고 경험적인 방법으로 검증이 불가능하다면, 검증이 가능한 다른 방법을 통해서 검증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하지만, 불가능한 방법을 억지로 강요하면서 증명하지 못한다고 거짓이라고 우기는 것은 완전한 억지 주장이라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순수하게 과학을 통해 완전 무오하게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시도도 논리적인 오류입니다. 신은 인간보다 차원이 높은 존재이고, 과학을 창조한 존재이며 비물질적인 존재입니다.

신보다 차원이 낮은 인간이 과학으로 신을 완벽하게 증명하려는 시도는, 저차원을 통해 고차원을 증명하고, 과학을 초월한 존재를 과학을 통해 증명하고, 물질적인 속성을 통해 비물질적인 속성을 증명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기 때문에 명백한 오류입니다.

저차원으로 어떻게 고차원을 입증하고, 과학을 창조하고 초월한 존재의 전체 속성을 어떻게 미미한 부분적 속성에 불과한 과학으로 증명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이는 명백한 논리적 오류인 것이지요.

신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완전히 입증할 수 없기 때문에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위와 같은 주장은 얼핏 생각하기에 굉장히 합리적이고 타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인 오류를 포함한 잘못된 주장입니다.

4.3. 신의 존재를 합리적으로 증명하는 방법

그렇다면, 과연 신의 존재 여부를 합리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신이 존재한다면, 신은 인간과 과학을 창조했기 때문에 신의 이성은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고, 신의 능력은 과학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 논리적으로 정상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살펴보면, 인간의 이성으로 '신의 완벽한 실체에 대한 100% 속시원한 연역적, 논리적 확증’은 불가능한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극히 정상입니다.

따라서, 신의 존재를 합리적으로 증명하는 방법은 이러한 과학적, 인식론적 검증 방법의 한계를 겸허히 인정한 상태에서, 인간의 이성과 방법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검증을 하는 것입니다.

신은 인간을 초월한 존재이기 때문에 초월적 존재의 피조물인 인간이 제한적인 이성으로 신의 실체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 자체가 논리적인 오류입니다.인간의 인식론적, 경험적,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서 어떤 사실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고 결정하는 방법은, 일반적인 사회 과학이나 자연 과학에서 시행하는 방법론과 차이가 없습니다.

어떤 사건이나 사실, 대상에 대한 '진위’를 판정하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방법론은 연역적 추론, 가설 설정에 의한 귀납적 추론, 신의 존재를 지지하는 증거에 따른 추가적인 확증으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신 존재의 증거 논증 (연역법)

신 존재를 논할 수 있는 첫 번째 방법은 연역적 추론입니다. 연역적 추론은, '증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자명하게 '참’이라고 인정되는 전제, 즉, '공리’에서 출발을 해서 논리적인 도출과정(일반적으로 삼단 논법)을 통해 추가적인 진리를 얻어내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자면,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면 보상을 받는다’ 라는 공리가 있다고 가정합시다.여기서 내가 열심히 일하고 노력했다고 가정합시다.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면 보상을 받는다는 공리가 참이고 내가 열심히 일하고 노력했다면, 내가 보상을 받게 된다는 논리를 도출해 낼 수 있지요. 전제가 참인 공리이고, 논리 도출 과정에 문제가 없다면, '내가 보상을 받게 된다’는 도출된 논리 또한 진실임을 알 수 있지요.

신의 존재 여부를 알 수 있는 방법 또한 연역적 추론 과정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 전제가 되는 공리는 '모든 존재하기 시작한 것에는 원인이 있다’라는 공리입니다. 막연하고 애매모호해 보이는 이 공리가 대체 신의 존재 여부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아래에서 상세히 설명하겠습니다.

신 존재의 증거 논증 (귀납법)

신 존재를 논할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은 귀납적 논증입니다. 귀납법이란, 여러가지 정보와 증거를 수집하여 그것의 공통적인 속성을 발견해서 추론하는 방법입니다.그런데 어떤 사실의 진위를 검증하거나 확인하기 위한 방법론으로는 가설 설정에 따른 확률적 귀납 논증이 표준적인 방법으로 널리 이용됩니다.

쉬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피고인이 살인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판사가 정말로 이 피고인이 살인을 저질렀는지 아니면 억울한 누명을 쓴 것인지 판별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판사는 증거 수집에 앞서, 가설 설정부터 해야합니다.

판사는 이 피고인이 실제로 살인을 저질렀을 가능성, 혹은 살인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 두가지 가능성을 일단 모두 염두에 두고 가설을 설정해야 합니다.

가설 설정 이후에는 가설을 진위를 판정하기 위한 증거 수집을 시작합니다. 혈흔, 지문, 목격자의 진술, 알리바이 유무, 정황증거, 증인 등 다각적인 측면에서의 증거가 수집됩니다. 판사는 증거를 종합하여 '피고가 살인을 저질렀을 가능성’을 강하게 지지하는가, '피고가 무죄일 가능성’을 강하게 지지하는가를 판단하게 됩니다.

물론 상반되는 증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상반되는 증거가 공존하여 무엇이 진실인지 판정을 내리기 힘든 경우에는 증거의 신뢰도가 강하거나, 증거의 개수가 많은 쪽의 주장을 진실로 채택하게 됩니다. 이 때의 판단의 신뢰도는 '수학적, 확률’로 표현됩니다.

앞의 예에서, 피고인의 살인 여부를 확인할 직접적인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간접적인 증거들을 수집한 후 이런 증거들이 종합적으로 피고의 살인을 증거하는지 무죄를 증거하는지를 '확률적 진실성’으로 검증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9명의 진실한 증인들이 무죄를 주장하고, 1사람의 거짓 증인은 살인자라고 주장하는 과정을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비록 피고인이 100% 무죄라고 '논리적으로 단정’할 수는 없어도, 피고인이 무죄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대단히 높은 확률의 신뢰성’을 가진 '합리적인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확률 따위는 필요 없고, 100% 완전무오하게 그 사람이 범인이라는 직접적이고 논리적인 확증이 없으면 믿지 않겠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궤변론자입니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연구 방법론에서 어떤 대상이나 사건의 진위 여부를 판별하는 기준은 결국은 이러한 귀납적인 다양한 증거 수집을 통한 가설 검증 방법입니다. 여러분은가설 검증에서 참 혹은 거짓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결정적인 요인은, '논리적인 확증’이 아니라 '수학적 혹은 경험적인 확률’이라는 점을 아셔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도 안되는 100% 확실한 경험적 확증, 논리적 확증만을 요구하는 사람은,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이 믿고 싶어하는 대상에는 관대한 기준을 적용하고, 믿기 싫은 대상에 대해서는 말도 안되는 억지 검증법을 강요하는 이중적인 기준을 적용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신의 존재를 가설에 따른 귀납적 추론으로 검증하는 방법은, 신의 존재 혹은 부재의 양방향의 가설을 세운 후, 합리적인 '방법론’들을 동원해서 증거를 수집하여 검증하는 방법입니다. 이를테면, 과학적 증거들도 있을 것이고, 초자연적인 현상도 있을 것이고,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역사적인 자료들도 있을 것이고, 어떤 개인적인 경험들도 있을 수 있겠지요.

예를 들어, 과학적인 증거를 통해 검증해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다음과 같이 과학적인 관점에서 양방향으로 가정을 합니다.

다음 단계에서는 우리가 경험적으로, 그리고 합리적인 방법론에 따라 '진실’로 인정되는 '사실’을 수집합니다. 그 다음에는 여기서 인정된 과학적 사실들이, 무신론적 가설과 유신론적 가설 중 어느 가설을 더 합리적으로 지지하고 모순이 적은지를 검증함으로써 어떤 가설이 참인지 검증합니다.

과학적 증거가 아닌 다른 증거들에 의한 검증 방법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증거들을 수집해서 종합한 결과, 많은 증거, 그리고 보다 신뢰도와 확실성이 증거가 유신론과 무신론의 가설 중 어떤 것을 더 확실하게 지지하는지를 검증함으로써 우리는 진실을 찾아냅니다.

신의 존재를 지지하는 경험적 증거들

마지막 검증 방법은, 신의 존재를 지지하는 경험적 증거입니다. 일반적으로, 연역적 방법과 귀납적 추론 두가지 방법 모두에 의해 지지가 되는 가설은 '참’이라고 강력하게 확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경험적 증거라는 요소를 추가한 이유는, '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인간의 이성의 한계를 '초월’한 존재이기 때문에, 사변적이고 공허한 이성의 산물로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연역적 방법과 귀납적 방법을 통해 신의 존재를 확인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실제로 체감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면, 너무나 막연하게 느껴진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정말로, ‘신,’ 그리고 특별히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하나님’이라는 유일신이 존재한다면, 그 하나님이라는 전지전능한 신적인 존재가 단순히 인간의 이성과 논리적인 사고 과정에서 '만들어진 허상’이 아니라는 것을, 인간의 수준에서 실제적으로, 인지하고 경험하고, 체험하고 검증할 수 있는 수단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신이 있을 것이라는 연역적인 증거도 찾았고, 귀납적인 증거도 찾았다고 칩시다. 어딘가에 '신’이라는 존재가 있을 것이라는 결론까지 얻었다는데까지 성공했다고 칩시다. 하지만, 신이 자신의 속성과 존재 가능성을 부분적으로라도 인간이 경험할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 신의 실체를 느낄 수 없겠지요.

과연 진짜로 그 신이 존재한다면, 우리 인간에게 다음과 같은 실제적인 증거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나는 실제로 존재한다. 그리고, 내가 인간 너희들에게 실제로 내가 있다는 것을 너희가 체험할 수 있도록 너희의 인생과 삶에서 직접 개입했하고 있다. 또한, 신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여러가지 일들을 실제로 너희에게 보여주었고 지금도 항상 보여주고 있다.

이 세가지 검증과정을 거치면, 비록 우리의 이성의 한계로 인해 신의 존재에 대한 완전무오한 논리적인 '확증’은 얻을 수는 없지만, 신이 실제로 존재에 대한 충분히 합리적이고 강력한 믿음을 얻는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인간의 이성, 과학, 논리로 신의 존재를 100% 확증할 수 있다. 따라서, 그런 방법으로 확증이 불가능하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억지 논리에 대한 저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질문하기에 앞서 그 질문의 전제에 붙어있는 비논리적인 오류와 궤변부터 무엇인지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이성적인 지성인이라면, 말도 안되는 억지 주장을 고수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과 방법론의 한계를 냉정하게 직시하고 인정한 상태에서, 그 방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의 합리적인 검증 방법을 적용하고 결과를 인정해야 합니다.

서론이 길었네요. 그러면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과연 신이 존재하는지 단계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5. 신 존재의 증명 (연역적 증거)

5.1. 연역적 추론에 의한 증명

신 존재를 논할 수 있는 첫 번째 방법은 연역적 추론입니다. 연역적 추론은, '증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자명하게 '참’이라고 인정되는 전제, 즉, '공리’에서 출발을 해서 논리적인 도출과정(일반적으로 삼단 논법)을 통해 추가적인 진리를 얻어내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자면,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면 보상을 받는다’ 라는 공리가 있다고 가정합시다.여기서 내가 열심히 일하고 노력했다고 가정합시다.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면 보상을 받는다는 공리가 참이고 내가 열심히 일하고 노력했다면, 내가 보상을 받게 된다는 논리를 도출해 낼 수 있지요. 전제가 참인 공리이고, 논리 도출 과정에 문제가 없다면, '내가 보상을 받게 된다’는 도출된 논리 또한 진실임을 알 수 있지요.

신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 또한 연역적 추론 과정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전제가 되는 공리는 2가지인데, 첫 번째는, ‘모든 존재하기 시작한 것에는 원인이 있다’ 이고, 두 번째는, 무에서 유가 창조될 수는 없다’ 는 것입니다.

대체 이 두 가지 공리가 신의 존재 여부와 무슨 상관인지 궁금하시죠? 우선 이 두개의 왜 진실인지부터 먼저 설명하겠습니다. 다음으로 이 두가지 '공리’를 통해 어떻게 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5.2. 우주의 기원

사람은 어떻게 존재할까요? 사람은 아버지의 정자와 어머니의 난자의 결합으로 만들어진다고 하면 완벽한 대답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정자와 난자를 제공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존재 원인에 대한 의문이 또 남게 되기 때문이지요.

부모님의 존재 원인에 대한 무한한 회귀가 끝까지 올라가게 되면, 궁극적인 해답은 창조론적 관점과 진화론적 관점의 두 부류로 갈리게 됩니다. 창조론적인 관점에서는, 모든 인간은 궁극적으로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에서 유래가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를 창조한 존재는 ‘하나님’ 이고,이런 관점에서 모든 인간의 궁극적인 근원은 하나님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반면, 진화론이나 무신론에서는, 구체적으로 확증을 할 수는 없지만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은 무수한 진화를 거쳐 발달해 온 하등한 원시 포유류’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그 하등한 원시 포유류의 궁극적인 기원은, 지극히 원시적인 형태의 단세포 생물이었고, 그 단세포 생물의 궁극적인 기원은 단백질과 RNA, DNA 등이었으며, 이들의 궁극적인 기원은 그것을 구성하는 탄소나 질소, 산소, 수소 등의 원소의 원자, 양성자, 전자 등의 미립자였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미립자의 궁극적인 원인에 대한 '무신론적인 관점’에서의 최종 원인은, ‘그냥 자체적으로 존재했다’ 라는 것입니다.

'그냥 자체적으로 존재했다’는 의미에 대해서는 지금부터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5.3. 우주의 기원에 대한 두가지 가설

다시 한 번 정리하겠습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무수한 존재’들 (사람, 동물, 식물, 물, 산, 돌, 바람, 지구, 태양, 달, 행성, 우주, 시간, 공간)의 궁극적인 기원에 대해 대해서는 두가지 상반된 견해가 존재합니다.

첫번째는, 만물의 근원은 더 이상의 궁극적인 원인이 없는, 그 자신이 최초의 원인인 '신’이라는 존재다라는 관점(유신론)입니다. 두번째는,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한도상에서 끝까지 시간과 원인을 거슬러 올라간 상태에서의 원시적인 요소들은 그냥 ‘자체적으로 존재했다’(무신론)라는 관점입니다.

첫번째 관점은, 만물의 존재에는 '시작점’이 존재했다는 관점이고, 두번째 관점은, 만물은 '시작점이 없이 자체적으로 존재했다’라는 관점입니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유신론에서는 만물에는 '신’이라는 분명한 최초의 근원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무신론에서는 만물의 원인은 없고, 그냥 만물은 자체적으로 존재했다고 주장합니다.

유신론적인 관점에서 '신’은 시공간을 초월할 뿐만 아니라, 시공간까지도 창조한 그 자신이 자신이 궁극적인 원인인 존재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이 창조한 우주 만물은 신이 창조를 시작한 최초의 '시작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물에는 존재의 시작점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무신론적인 관점에서는, 우주 만물이 원래부터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즉, 만물은 존재하기 시작한 '최초의 시점’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냥 자체적으로 존재했다는 관점입니다. 그 원인은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상반되는 관점을 그냥 생각의 차이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주장은 완전히 서로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개인적인 기호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둘 중의 하나는 완전히 옳고, 나머지는 완전히 틀립니다. 타협의 여지가 없습니다.

5.4. 수학적 추론을 통한 검증

'만물의 근원’에 대한 상반된 관점 중 어떤 것이 맞는 것인지 대체 어떤 방법으로 검증할 수 있을까요? 두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수학과 물리학입니다.

우선 수학적 추론에 의한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앞서, 만물의 근원을 확인하는 방법은 원인을 한단계씩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무신론자들은 우주 만물의 최초의 근원은 그냥 ‘그것 자체’ 라는 주장합니다. 이런 무신론자들의 주장을 다르게 표현하면, 기본적인 원인은 '무한대 이전의 시간부터 존재했다’라는 것입니다.

우주의 시작점 자체가 없었다면, 우주의 과거 사건의 수는 무한대라는 의미가 됩니다. 앞의 예에서는 나의 위에는 부모가 있고, 부모님의 위에는 또 부모가 있고, 그 부모의 위에는 또 부모가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무한대의 선행 원인과 사건이 존재해야 한다는 의미이지요. 만일, '무한대’라는 개념이 현실 세계에서 실재하는 개념이라면, 무신론적인 관점이 틀렸다고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수학자들은 '존재하는 사물의 무한수’라는 개념은 자기 모순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습니다. 우리가 수학에서 '무한 급수’나 '극한’을 논할 때 다루는 '무한’이라는 개념은 인위적으로 정의한 '가무한’입니다.

직관적으로도, 현실 세계에서 '무한’은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무한대 빼기 무한대는 무엇이 될까요? 0 일까요? 무한대일까요? 자기 모순입니다.

20세기 최고의 수학자 중의 하나인 David Hilbert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무한대(infinity)는 현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자연에 존재하지도 않고, 이성적 사고를 위한 어떤 토대도 제공하지 않는다. 무한대라는 개념이 하는 유일한 역할은, 단지 아이디어, 개념이라는 것 뿐이다.

과거의 원인이나 사건들은 단순히 아이디어나 개념이 아닌 '실재’이기 때문에 과거 사건의 수는 '한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일련의 과거 사건과 원인들은 '영원’과 '무한’이라는 미궁 속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없고, 반드시 시작한 시점이 있어야 한다는 수학적인 결론을 얻게 됩니다.

따라서, 무신론자들이 주장하는 만물의 근원에 대한 관점은 이러한 이러한 수학적, 철학적 논리에 의해 반박이 되고, 논리상 오류가 존재합니다.

5.5. 현대 물리학을 통한 검증

이 내용에 동의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한 편으로는 추상적인 논증이라 잘 와닿지 않는다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만일, 이성적인 증거가 그냥 추상적인 '수학적인 추론’에만 의존한다면 충분히 답답하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무신론자들은 인간의 합리적 지성의 상징인 수학 뿐만 아니라 물리학에서도 결정타를 맞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20세기 현대 물리학의 가장 위대한 발견 중 하나인 '빅뱅’이론 때문이었는데, 이 빅뱅이론에 의해 무신론적인 우주만물의 기원문제는 수학적 오류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현대 물리학에 의해서도 정면으로 반박되게 됩니다. 이는 불과 반 세기 전의 일입니다.

빅뱅 이론은 우주 만물은 '무한대 이전의 시간부터 그냥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지금으로부터 130억년 전이라는 분명한 시점에 시작되었다는 주장입니다. 모든 물질과, 에너지, 물리적 시간과 공간이 지금으로부터 130억 년 전의 이 시점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다는 이론입니다.

빅뱅이론은 초기에는 하나의 가설로만 생각되었으나 허블의 은하의 적색 이동,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우주 배경 복사의 발견으로 현대 우주론의 표준적인 모델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빅뱅 이론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이후에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빅뱅이론의 핵심은 결국, 우주는 원래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특정한 시작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무신론적인 기원의 가설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내용입니다. 무신론자들의 관점에서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려는 방법은 우주는 원래부터 있었다라는 '정상 우주론’이었으나, 빅뱅이론의 검증으로 인해 정상 우주론은 과학계에서 사장되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무신론자들 중 일부는 빅뱅이론을 이용해서 무신론적인 관점으로 만물의 기원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었는데요, 그 방식은 이렇습니다.

‘130억 년전 무에서 유가 창조되어 시작되었다’

여기서, 심각하게 고민해보아야 하는 것은, '무에서 유가 창조된다’는 내용입니다. '절대적인 무’에서 '유’가 창조될 수 있습니까? 무(nothing)가 '유(being)'의 원인이 될 수 있나요?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만일 여러분께, 텅빈 상자 하나를 보여주고 잠시 상자를 가려두었다가 컴퓨터가 나올 수 있다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제가 미쳤다고 할 것입니다. 컴퓨터 같은 복잡한 것 말고, 훨씬 단순한 다른 대상은 어떨까요? 대상을 바꾼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핵심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뭔가가 저절로 만들어 질 수 있다는 패러다임에 대해서 직관적으로 동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무에서 유가 만들어질 수는 없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증명이 불가능하지만, 그 누구도 이것이 틀렸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무의 상태에서 어떻게 어떤 것이 창조될 수 있습니까? 그래서, 무에서 유가 창조될 수는 없다는 전제는 '공리’의 영역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우주를 시작케 한 원인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5.6. 칼람의 논증에 의한 증명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논증을 펼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칼람’의 논증입니다.

  1. 존재하기 시작한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다. (무에서 유가 나올 수는 없다)
  2. 우주는 원래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라, 존재하기 시작한 시점(최초의 시작점)이 있었다. (빅뱅 이론으로 증명)
  3. 따라서, 우주에는 원인이 있다.

처음 두개의 전제가 진실임을 받아들인다면, 논리적으로 우주에는 원인이 있다는 결론 또한 논리적으로 진실임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연역적 추론에 의한 논증 방법입니다.

여기까지 설명드리면, 반드시 나오는 반론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그 신이라는 존재의 원인은 뭐냐?’ 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주의 근본 원인이 된 '첫 원인’은 논리적으로 반드시 자신의 존재를 야기시킨 상위의 원인을 가질 수 없고, 불변하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비물질적 존재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원인의 영원한 회귀(어떤 존재의 원인의 원인의 원인의 원인의 원인과 같이 끝없는 원인을 찾다가 시작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리에 빠지는 딜레마)는 오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원인의 '궁극적인 첫 원인’은 예외적으로 인과성에 얽매이지 않는 특별한 존재여야 한다는 논리적인 결론을 얻게 됩니다.

또한, 빅뱅이론에서 도출된 바와 같이 그 최초의 궁극적인 원인은 스스로 시간과 공간을 창조한 존재이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존재여야 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5.7. 요약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런 존재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속성과 일치합니다.

여러분은 혹시 신의 존재에 대한 논증이 그냥 아무런 근거 없이 주관적인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착각하셨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논증은 이와 같이 엄밀한 수학적 사유와, 물리학적인 근거에 기반을 둔 엄격한 증명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지성인이라면, 이런 이유 때문에무신론적인 기원론이 오히려 수학적, 논리적, 물리학적인 오류로 점철되어 있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수학적 추론과 최신 현대 물리학에 기반을 둔 둔 연역적 추론을 통해, '신’이라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없이는 우주만물의 기원을 논리적으로 모순없이 설명할 방법이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6. 신 존재의 증명 (귀납적 증거)

6.1. 귀납적 논증에 의한 증명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두 번째 방법은, 가설 설정에 따른 귀납적 논증입니다. 귀납법이란,여러 정보와 증거를 수집하여 그것의 공통적인 속성을 발견해서 추론하는 방법입니다. 어떤 사실의 진위를 검증하거나 확인하기 위한 방법론으로는 가설 설정에 따른 확률적 귀납 논증이 표준적인 방법으로 널리 이용됩니다.

6.2. 귀납적 논증의 개념

가설 설정에 따른 귀납적 논증이라는 개념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살인 혐의로 기소가 되었습니다. 판사인 여러분은 이 피고가 유죄인지 무죄인지 판결을 내려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러분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피고가 진짜로 살인을 저질렀는지 여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초능력’을 발휘하여 피고가 살인을 저질렀다고 의심되는 과거의 시간으로 되돌아가서 당시 사건을 관찰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위를 판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비록 불완전하지만 증거를 수집해서 간접적으로 '추정’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최선입니다.

그런데, 이런 증거 수집 단계 이전에 필수적인 절차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가설 설정입니다. 모든 과학적 연구 방법론에서 어떤 주제의 진위를 가리는 과정의 첫 단계에서는 가설의 진위를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임의의 가설을 설정하고 검증을 시작합니다.

살인범의 예로 되돌아가면, 판사인 여러분은 수사의 가장 첫 단계에서, ‘이 사람은 살인범이다’ 혹은 ‘살인범이 아니다’ 라는 가설을 최우선적으로 설정해야 합니다. 이후 객관적인 조사와 증거 확인를 통해서 이 가설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가리게 됩니다.

살인에 이용된 흉기에서 발견된 지문과 혈흔이 피고의 것과 일치하고, 동일한 시간에 피해자와 피고가 동일한 장소에 있었다는 목격자의 증언과 CCTV와 같은 객관적인 증거자료가 확인된다면 우리는 '피고는 살인범이다’라는 가설이 참이라고 합리적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지문과 혈흔이 다른 사람의 것이고, 동일한 시각에 피고가 다른 곳에 있었음이 확증된다면 '피고는 살인범이다’라는 가설은 기각할 수 있고, 피고는 무죄를 선고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설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증거나 검증의 신뢰성’ 인데, 이는 통계적 혹은 수학적인 확률의 개념으로 표현됩니다. 앞의 예에서, 지문과 혈흔 감식에서 피고의 것이라는 증거가 발견되었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문과 혈흔이 피고의 것과 일치하므로, 이 사람은 살인범이 100% 확실하다’고 결론내릴 수 있는 것일까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러한 증거도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문과 혈흔 감식은 정확도가 높은 검사이지만, 확률적으로 검사에 오류가 있거나 미처 생각하지 못한 다른 오류가 있을 사소한 가능성마저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지문 감식과 혈흔 감식의 정확도가 99%라고 가정한다면, 엄밀하게 말해 우리는 그 사람이 범인이라고 내린 결론의 신뢰도와 정확도가 99%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1%의 틀릴 가능성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모든 증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알리바이건, 목격자의 진술이건, CCTV이건, 어떤 증거이건 ‘불확실성’ 혹은 '오류’의 가능성은 존재하지요. 증인을 돈으로 회유하면 알리바이와 목격자의 진술을 조작할 수 있고, CCTV도 정교하게 조작이 이루어진다면 거짓 정보를 제공할 가능성도 있지요.

‘직접적’이고’ 확실하고’, ‘100% 완벽한’ 증거는 현실 세계에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내가 ‘직접적으로 확실하게 체험한 증거’ 또한 다른 사람에게는 애매모호한 '간접적인 증거’로 바뀌어 버립니다. 사람들은 어떤 사실의 진위 여부를 검증했을 때, 이러한 증거에 의한 확실성이 '100%'라고 무의식적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6.3. 궤변론자들의 오류

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흔히 다음과 같은 오류를 범합니다.

유전자 검사, CCTV의 증거, 다수의 목격자의 진술, 정황증거와 기타 수많은 물증이 모두 피고의 살인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고, 증거의 종합적인 정확성은 99.9999999% 이상이다. 하지만, 0.000000000001%의 오류 가능성은 배제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 증거는 100% 완벽하지 못하므로 믿을 수 없다.

합리적인 검증 절차에 따른 결론을 내리는 기준은 '100% 완전무결한 완벽성’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자신들이 그토록 신봉하는 자연과학에서도 결론을 내리는 기준은 논리적, 경험적 완벽성이 아닌, '일정 수준 이상의 높은 확률적 신뢰도’입니다.

이들이 무의식적으로 범하는 심각한 오류 또 하나는, 확실성과 불확실성이라는 것의 상대적인 비중을 똑같이 취급한다는 것입니다.

앞의 예에서 증거의 정확성이 99%이고, 불확실성이 1%라면, 정확성은 불확실성보다 무려 99배나 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런 정량적인 차이를 완전히 무시하고 단순히 '불확실성의 존재’라는 단순한 이유 하나만으로 99배나 신뢰도가 높은 증거를 믿을 수 없다라고 기각하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도 이런 주장이 말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인정하기 싫기 때문에 억지 주장을 펼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적인 연구 방법의 검증 절차에서 참 혹은 거짓임을 판단하는 기준은 '100% 완전무결한 논리적 확증’이 아니라, '일정 수준 이상의 확률적인 신뢰도’입니다. 일반적으로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5%, 좀 더 엄격한 기준에서는 1%보다 낮은 경우(이를 통계적인 유의 수준, p-value 라고 합니다), 오류의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왜냐하면, 참일 가능성이 95% 혹은 99% 정도로, 오류를 범할 가능성보다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에 틀릴 가능성을 합리적으로 기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합리적, 과학적 사유를 추구하는 지성인이라고 주장하면서, 다수의 압도적이고 신뢰도 높은 증거를 제시해도 지극히 낮은 불확실성과 오류 가능성만을 고수하며 고집을 부리는 것은 궤변이자 억지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논리적’인 완벽한 진실을 추구하는 완벽주의자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이런 이유 때문에 '망상’에 빠진 궤변론자입니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이 세상에서 믿거나 검증할 수 있는 사실은 단 한가지도 없습니다. 왜냐면, 그들이 믿고 있는 그 어떤 사실이나 진실에 대해서도 '그게 거짓일 가능성이 단 0.0000000000001% 도 없냐? '라고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6.4. 진실을 찾아내는 합리적인 방법

요약하면, 우리가 어떠한 사실이나 현상에 대한 진실 여부를 가리기 위해 합리적, 과학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가설을 세운다.
  2. 각종 증거나 연구, 실험을 통해 가설을 검증한다.
  3. 검증한 결과를 취합하고 검증된 통계적, 확률적 신뢰성을 확인하고, 이 신뢰도가 특정한 수준이상이고,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특정한 수준보다 낮으면, 검증한 가설이 '진실’임을 받아들인다.
  4. 사실 여부의 판단 기준은 '논리적으로 무결한 100% 확실성’이 아닌, 특정 수준 이상의 경험적, 확률적 신뢰도이다.

6.5. 상충되는 증거들,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여기까지 이해하셨다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관점에서 진실을 확인하는 방법이 기본적으로 어떤 것인지 개념을 잡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실을 검증하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증거가 상충되는 경우도 상당히 많기 때문입니다.

이를 테면, A라는 목격자는 피고가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B라는 목격자는 범인이라고 주장하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판정을 해야 할까요? 피고가 범인인 동시에 범인이 아닐 수는 없습니다. 이는 논리적 모순입니다.

그렇다면, 여러가지 증거가 서로 상충되거나 모순이 되는 경우에는 과연 어떤 방법을 통해 진실을 가릴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바로 앞에서 설명드린 방법론을 조금 더 확장하면 됩니다. **상충되는 증거가 공존할 경우, 보다 강력하고 확실하고 개수가 많은 쪽의 증거가 신뢰성이 떨어지거나 개수가 적은 쪽의 증거를 상쇄시키게 됩니다.

이 때, 진위의 확실성의 정도는 '수학적, 경험적 확률’로 표현**되며, 가설 검증과 동일한 방식으로 검증합니다. 이는 통계학에서 '베이즈 정리’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베이즈 정리는 사후 확률을 통해 사전 사건의 확률을 추정하는 통계적 접근법입니다. 베이즈 정리를 이용하면, 어떤 동일한 사실의 진위 여부를 지지하는 여러 개의 상반된 증거가 있을 때 무엇이 진실에 가까운지 쉽게 추정할 수 있습니다.

베이즈 정리에 의하면, 특정 증거의 신뢰도가 압도적으로 높을수록, 참 혹은 거짓임을 시사하는 증거의 개수가 반대 증거보다 압도적으로 많을수록, 그것을 진실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어떤 사람이 살인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법원에 10명의 증인이 소환되었습니다. 9명의 증인은 피고가 무죄임을 주장했고, 1명의 증인은 유죄임을 주장했습니다. 여러분이 판사라면 어떻게 판결을 내리시겠습니까?

무죄임을 증거한 9명의 증인은 대단히 진실하다고 평판이 난 사람들이어서, 이 사람들이 진실을 말할 가능성은 90%이고, 거짓을 말할 가능성은 10% 였다고 합시다. 반면 유죄를 주장한 나머지 한 사람은, 거짓말이 습관인 사람이기 때문에 진실을 말할 가능성과 거짓을 말할 가능성이 각각 50%라고 가정하겠습니다.

9명의 진실된 사람이 '무죄’임을 증거했고, 나머지 1사람은 '유죄’임을 증언한 이 상황에서, 실제로 이 피고가 유죄일 확률은 어떻게 될까요?

그 확률은, 다음과 같이 계산됩니다.

각 확률을 따로 계산해보겠습니다.

즉, 위 상황에서 피고가 유죄일 확률은 0.00000005%, 무죄일 확률은 99.99999995%로 계산됩니다.

따라서, 9명의 진실한 사람이 피고가 무죄임을 증거하고 신뢰하기 어려운 한 사람만이 거짓임을 증거할 경우, 비록 한 사람이 거짓임을 증거했을지라도, 절대 다수의 신빙성 있는 증거들은 그 사람이 유죄임을 강력하게 시사합니다.

따라서, 피고가 유죄일 가능성은 0.0000000005 / 0.1930000005 = 거의 0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9명이 무죄를 이야기 했고 1명이 무죄를 이야기 했으니, 피고가 무죄일 가능성은 90% 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높은 거의 100%에 가깝게 되는 것이지요.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요? 이제는 9명의 증인이 거짓말을 자주 해서 진실을 말할 가능성이 50%에 불과하지만, 한 사람은 진실을 말할 가능성이 99.999999999%라고 가정해보겠습니다. 이 때, 9명의 증인이 모두 유죄라고 주장하고, 1명의 진실된 증인은 무죄라고 주장하는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무려 9명이 유죄라고 주장하고 1명만이 무죄임을 주장하지만, 9명의 발언은 대부분 신뢰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유죄로 믿기는 힘들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계산해서 확인해봅시다.

각 확률을 따로 계산해보겠습니다.

피고가 유죄일 확률은 0.00000000005% 로 계산됩니다. 9명의 거짓말쟁이들이 아무리 거짓 증언을 하더라도 한 사람의 진실된 증언이 압도적으로 높은 신뢰도를 가진다면, 수많은 거짓 증거를 상쇄할 수 있습니다.

이런 원리를 '베이즈 정리’라고 합니다. 베이즈 정리를 어떤 사건의 진위여부를 판정하는 통계적 신뢰도의 개념으로 접근하면 얻을 수 있는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실은 직관적으로 생각해도 너무나 당연한 내용입니다.

  1. 어떤 사실을 지지하는 증거의 개수가 많을수록, 그것이 참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1가지 증거만 존재하는 것보다는 10개, 100개 증거가 있을수록 참일 가능성이 높다.)
  2. 신뢰도가 높은 증거는 신뢰도가 낮은 증거의 신뢰도를 상쇄시킬 수 있다.(거짓말쟁이들 100명이 맞다고 주장해도 믿을 만한 진실한 증언 하나가, 100명의 거짓말쟁이들의 증거를 기각시킬 수도 있다.)
  3. 상충되는 증거들이 존재하는 경우, 진위 여부는 지지하는 증거의 상대적인 개수와 신뢰도에 의해 결정된다. 두 요소를 종합하여 계산된 수학적 확률 수치를 통해 진실, 혹은 거짓으로 결정할 수 있다. 단순히 상대방의 주장과 상반되는 것을 지지하는 증거가 존재 자체는 아무런 근거로 작용하지 못한다.

6.6. 끝없는 억지 주장

제가 이런 뻔한 결론을 '베이즈 정리’라는 수학적인 개념과 함께 복잡한 계산식까지 보여주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논리를 모르고 막연하게 다음과 같은 억지 주장을 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성경이 진실이고,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10가지 증거를 제시했고 나 또한 이에 동의한다. 그런데, 내가 아는 어떤 무신론자들은 성경이 거짓이고, 하나님도 없다는 것을 지지하는 10가지 증거를 제시하더라. 당신 주장이 정말 참이라면, 성경이 거짓이고 하나님도 없다는 증거는 없어야 되는 것 아닌가?

참과 거짓은 공존할 수 없는데 무신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성경이 거짓이라는 증거도 있으므로 모순이다. 따라서, 성경과 하나님이 진실이라는 주장은 논리적 오류이다.

이는 명백한 억지 주장입니다. 만일 이런 논리라면, 똑같은 방식으로 반박도 가능하지요.

무신론자들은 성경과 하나님이 거짓이라는 증거를 10가지 제시했는데, 나는 성경과 하나님이 진실이라는 10가지 증거를 알고 있다. 거짓과 참은 공존할 수 없는데 만일 성경과 하나님이 정말로 거짓이라면 참이라는 증거는 전혀 없어야 하는 것 아닌가?

참과 거짓은 공존할 수 없는데 유신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사실이라는 증거도 있으므로 모순이다. 따라서, 성경과 하나님이 거짓이라는 주장은 틀렸다.

똑같은 논리인데, 똑같은 궤변입니다. 이 논리의 오류가 무엇일까요? 동일한 대상에 대해 참과 거짓은 상호 완전히 배타적이므로 공존할 수 없습니다. 즉, 하나님의 존재가 참인 동시에 거짓일 수는 없습니다. 어떤 피고가 유죄인 동시에 무죄일 수 없듯이 말이죠. 하나님이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것입니다. 피고가 유죄면 유죄고, 무죄면 무죄인 것이지요.

따라서, 앞서 제시한 예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지지하는 증거 10개와 부정하는 증거 10개가 있는 경우, 지지하는 증거 10개가 모두 틀리거나, 부정하는 증거 10개 모두가 틀리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지지하는 증거가 10개 있는 상황에서 단순히 그에 반대되는 부정하는 증거의 존재 자체는 지지하는 증거를 부정할 논리적인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논리적으로 주장하기 위해서는, 지지한다고 주장하는 10가지 증거가 '사실은 거짓이었음’을 증거하는 근거를 대야만 가능하지요.

베이즈 정리에 입각하여 또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볼까요? 성경이 진실임을 증거하는 10가지 증거가 있고, 성경이 거짓임을 지지하는 증거 또한 10가지가 존재한다면, 진위를 가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성경이 진실임을 지지하는 증거들의 신뢰도와, 성경이 거짓임을 지지하는 증거들의 신뢰도를 서로 비교해서 어느쪽이 진실일 가능성이 높은지를 계산해 보아야 합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성경이 진실임을 지지하는 여러 증거 중 한가지는 '예수님의 실존과 부활’이라는 증거입니다. 만일 예수님이라는 인물이 ‘허구적’ 인물이라면 성경 또한 허구가 되어버리기 때문이지요.

다음으로, 성경이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근거 중 하나는 ‘노아의 홍수’ 설화와 고대 수메르의 길가메시 서사시와의 유사성입니다. 그들은 길가메시 서사시와 노아의 홍수 간의 유사성을 근거로 노아 홍수는 길가메시 서사시를 베낀 가짜이므로 허구라고 주장을 합니다.

예수님의 실존이라는 증거와 길가메시 서사시와의 유사성이라는 증거가 각각 어느 정도의 신뢰성으로 성경의 사실성 혹은 허구성을 증거한다고 추정해 볼 수 있을까요? 아쉽게도, 이런 역사적 사실에 대한 부분은 ‘수학적’ 혹은 ‘과학적’ 실험으로 검증이 가능한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임의로 가정한 '경험적 확률’을 적용해야 합니다.

이 블로그의 성경의 역사성이라는 주제에서 상세하고 방대하게 다루겠지만, 예수님이라는 인물의 실존은 비단 성경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고, 여러 고대 문서에서 다뤄지고 있습니다. 또한, 로마박해하에서도 기독교인들이 순교한 무수한 역사가 기록되어 있지요. 인류의 역사를 구분짓는 BC와 AD의 기준 또한 예수님의 출생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는 내용은 상식 중의 상식입니다.

굳이 세세하게 다루지 않고, 너무나 당연한 증거들만을 바탕으로 검증해봅시다. 예수님이 실존 인물이 아니었다면 성경을 비롯한 다수의 고대문서에서 예수님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설령 수많은 역사가들이 집단적으로 공모하여 예수님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런데, 그런 허구의 인물을 목숨까지 바쳐 추종해서 로마 박해하에서도 집단적으로 순교하고, 실존하지도 않은 인물을 바탕으로 인류의 역사를 구분짓는 연도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가능할까요? 이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정신병자일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실존은 '성경의 진실성’을 대단히 높은 신뢰성으로 지지하는 '한가지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실존이라는 단한가지 증거로 성경의 모든 내용이 참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은 아니라는 점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

길가메시 서사시의 경우는 어떨까요? 성경의 허구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근거로 삼는 것은 길가메시 서사시와 노아의 홍수의 내용상 유사성, 그리고 길가메시 서사시의 기록 연대가 성경보다 앞선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이것들은 근거로 성경은 길가메시 서사시를 베낀 가짜 설화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반대의 해석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기록 연대가 앞선다는 사실이 표절을 의미하는 확증은 되지 못하며, 성경과 길가메시 서사시의 내용적 유사성도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고대에 전지구적인 홍수 사건이 실제로 있었음을 증거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요.

이는 지리적으로 떨어진 지역에서 시간적으로 다른 세대에 고대에 동일하게 발생한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기록이라는 관점에서도 충분히 설명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길가메시 서사시라는 증거는 성경의 허구성을 지지하는 관점에서 해석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는 성경의 진실성을 지지하는 증거로도 동일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장하는 사람의 시각과 관점에 좌우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길가메시 서사시라는 증거는, 성경의 허구성을 증거하는 강력한 증거는 되지 못합니다.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가능성도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결론적으로, 이 증거의 신뢰도는 50% 정도라고 생각할 수 있지요.

예수님의 실존성이라는 역사적 근거가 거짓일 가능성도 분명히 존재하고, 길가메시 서사시가 성경의 허구성을 지지할 가능성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실존성이라는 역사적 근거가 거짓일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하나, 길가메시 서사시를 통한 성경의 허구성의 증거가 이를 압도할 정도의 강력한 증거는 결코 되지 못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99.99999%의 신뢰성과 50%의 신뢰성이라는 증거를 놓고 비교해 보면, 우리는 합리적이고,과학적이며,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관점에서 길가메시 서사시의 증거를 기각할 수 있습니다.

신이 실제로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성경과 하나님이 참이냐 거짓이냐? 에 대한 무수한 논란은 무수한 증거들에 의해 끝없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사람들은 개별적인 증거의 진위 논쟁에만 골몰할 뿐, 보다 근본적인 이런 최종적인 진위 판단의 근거가 되는 사고 방식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100가지 증거를 제시하면, ‘귀를 막고 있다가’, 상대방의 주장을 반박할 단 한가지 증거가 나오면, 그 1가지 증거로 상대방의 100가지 탄탄한 증거를 한 번에 반박할 수 있다는 논리적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신의 존재, 성경과 하나님, 예수님, 기독교에 관한 무수한 지지 증거도 있지만, 무수한 반박 증거 또한 있다는 것 저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중의 일부는 저 또한 과연 신과, 하나님, 예수님, 기독교가 사실일까? 라는 의문을 갖게 할 정도로 타당성이 높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자신있게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며, 성경의 모든 내용은 진실임을 여러분께 강력하게 증거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성경의 진실성, 역사성,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논리적, 과학적, 역사적, 경험적, 체험적 증거 중 '압도적’으로 신뢰성이 높은 것들이 즐비합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증거들을 취합한 신뢰성은 하나님의 존재, 성경의 진실성, 역사성,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강력하게 부정하는 논리적, 과학적, 역사적, 경험적, 체험적 증거의 신뢰성보다 압도적으로 큽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기각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살인사건에 대한 판결을 맡았을 때, 사건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고, 피고의 살인 사건과 별 상관이 없는 매수된 무수한 거짓 증인들이 위증을 해서 혼란을 준다고 가정해봅시다.

하지만, 조작이 불가능한 CCTV에 생생하게 피고의 살인 현장이 그대로 찍혀있고, 현장에서 피고의 DNA와 일치하는 검체와 지문이 확인이 된다면, 혼란스러운 거짓 증거들은 이러한 압도적으로 강력한 증거들에 의해 완전히 상쇄되어 버리지요.

거짓 증언에 어떤 오류가 있었는지는 비록 검증과정에서 알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올바른 결론을 내리는데에는 별 장애물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개별적인 증거의 진위를 모두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증거를 취합한 결과가 내리는 결론이 무엇이냐이기 때문이지요.

제가 그토록 압도적으로 강력하다고 주장하는 '신의 존재’와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증거는 이후의 글에 상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께 다음을 부탁하고 싶습니다. 저는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왜 하나님이 실재하시며, 성경과 기독교가 진실인지에 대해 최선을 다해 설명할 것입니다.

하지만, 행여 제가 여러분을 설득하지 못하거나, 설령 어떤 주제에 대해서는 하나님과 성경이 허구인 것처럼 느끼게 하는 주장이나 근거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그런 근거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압도적으로 강력한 무수한 증거들을 부정하는 논리적 오류를 결코 범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제게 불리해서가 결코 아니라, 이런 논증 자체가 논리적인 오류를 안고 있는 궤변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모든 사실에 대한 진실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모든 증거에 대한 진실 또한 규명할 수는 없습니다. 오류의 가능성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수학적 진실인 베이즈 정리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이성적인 진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류의 가능성과 해석의 논란의 여지가 있는 애매한 증거로 진실을 흐리지 말고, 보다 뚜렷하고, 확실하고, 강력한 증거들을 취합해서 최종적으로 그것이 내리는 결론을 취하는 것이 합리적인 태도이자, 진실을 추구하는 방법론이라는 것이지요.

혼란스러운 거짓 증거들은 강력한 진실의 증거에 상쇄될 뿐입니다. 그런 자잘한 의문은 '논리적 모순’이 아니라, 실제로는 거짓인데 단지 아직은 왜 그것이 거짓인지 몰라 사실이라고 임시로 착각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6.7. 신의 존재의 귀납적 증거

그렇다면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서 '신의 존재’를 시사하는 귀납적인 증거를 알아보겠습니다. 신의 존재를 시사하는 귀납적인 증거에는 '우주의 미세 조정’과 '인간의 도덕률’이 있습니다.

우선 '우주의 미세 조정’이라는 증거를 살펴보겠습니다. 우주의 미세 조정은 우주는 '미세하게 조절된 정교한 규칙성’에 의해 유지되고 존재한다는 개념입니다. 시간이 시작되어 우주가 시작된 그 시점부터 우주의 모든 물질들은 정밀하게 조정된 법칙과 수치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이를 테면, 물질을 서로 잡아당기는 중력이 없다면 행성도, 항성도 없고, 어떤 형태의 복잡한 유기체든 생성이 불가능합니다. 또한 강한 핵력이 없다면 원자핵에 양성자와 중성자를 잡아둘 힘이 사라지므로 원자 자체가 생성될 수도 없고, 화학물질이라는 것 또한 존재할 수가 없지요.

전자기력이 사라지면 화학물질 사이의 연결고리가 없어져 빛이 사라집니다. 이런 식으로 우주의 생명체가 존재하기 위한 기본 법칙들 중 단 하나만 제거해도 생명체는 우주에 존재할 수 없게 됩니다. 이처럼, 생명체라는 것은 무수한 물리적 상수에 의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미세한 조정’에 의해서 세팅되어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강력한 증거는 중력인데, 중력은 140억 광년에 달하는 전 우주에 걸쳐 분포하고 있지만, 이 중력의 세팅을 단 1인치만 움직이게 되면 생명체에 미치는 영향은 가히 재앙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중력이라는 요소 또한 생명체의 탄생과 유지를 위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30여 가지 요구 조건 중의 단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이 뿐만 아니라 우주가 팽창하는 속도인 우주 상수 또한 미세 조정의 강력한 증거입니다.

만일 공간이 너무 빨리 팽창하면 우주가 너무 급격하게 부피가 증가하여 생명체가 생성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항성이나, 행성, 은하 등은 존재할 수가 없게 되지요. 물리학자들은 우주 상수가 1/10^53 의 정확도로 조정이 되어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 정확성을 비유로 하자면, 우주를 수백 마일 여행하다가 다트 하나를 지구에 던졌을 때, 직경 1/10 ^24 cm (0.000000000000000000000001 cm)의 목표물을 정확히 맞추는 수준입니다. 그 넓이는 원자 하나의 면적보다도 좁습니다.

30여가지 요구 조건 중 단 2가지, 중력과 우주 상수 2가지가 랜덤한 확률에 의해 모두 적절하게 조정되어 있을 확률은 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1 에 불과합니다.

무신론자들은 '신이 없다는 가정’하에 우주의 규칙성들은 초자연적은 정교한 지성적 존재가 아닌 랜덤한 프로세스에 의해 형성되어 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원인은 알 수는 없지만, 그 규칙성의 원인은 '신’은 아닐 것이다…라는 전제를 깔고 논증을 시작한 것이지요. 가설이야 아무 문제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가설을 실제의 우주 상황에 적용해보니, '랜덤한 확률’에 의해 현재의 우주와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이 그야말로 0에 가깝다는 사실이 밝혀져 버린 것이지요. 앞서 말씀드린 귀납적인 논증법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까다로운 자연과학적 방법론에서도 오류의 가능성이 1% 미만이면 과학적인 사실로 인정을 하고, 오류 가능성이 단 1%만 초과해도 기각합니다.

그런데, 랜덤한 프로세스에 의해 우주가 지배를 받고 있다라는 가정의 오류 가능성은 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 이상일 것이라는 결론이 나와버린 것이지요. 진실일 가능성이 아닙니다. 오류 가능성이 5%, 10% 수준도 아닌 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9% 이상이라는 것입니다.

무신론자와 자연주의자들은 생명체의 존재와 우주에 존재하는 무수한 규칙성과 정교한 상호 작용이 서로 무관하게 작용해서, 각각의 법칙이 정교하게 조정되고 상호 작용할 필요가 없기를 바랬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바램은 안타깝게도 그들이 종교처럼 신봉하는 '과학적 진실’에 의해 완전히 부정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이를 합리화하기 위한 방안을 생각해내는데 그게 바로 다중 우주론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수많은 우주의 하나에 불과하며 각각의 우주는 서로 다른 물리법칙과 불변량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우주가 무한 개라면,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도 존재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다중 우주론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두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 오류는, '무한개의 우주가 존재한다’라는 독립적인 증거가 단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끼워맞추기식으로 '가설’을 제시했지만, 그에 대한 실증적인 증거가 없다는 것이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검증이 불가능하고 증거가 없는 가설은,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입니다. 단순히 '제시’했다는 사실하나만으로 '사실’로 인정받는 것은 아니지요.

두 번째 오류는, 설령 그런 방식으로 우주가 존재한다고 쳐도 문제는 하나 더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한한 형태, 무한한 조합의 규칙성을 만들어내는 '우주 생성기’의 정체는 대체 무엇입니까? 누가 만든걸까요?

결국 다중 우주론을 제시한다고 한들 우주의 근본적인 기원의 문제는 전혀 해결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무신론적인 관점이나 다중 우주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은 것만을 보려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도 합니다. '당신이 지금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 것은 ‘필연성’에 근거한 주장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내용입니다.

우리는 미세 조정된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을 놀라워 할 필요가 없다. 만약에 지금과 같은 특정한 우주가 지어지지 않았다면 이 시점에서 우리 자체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이 시점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확률적인 불확실성을 운운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미 그렇게 희박함에도 이미 그런 현상을 겪고 있으니까

마치 복권에 당첨될 확률은 지극히 희박해도, 만일 내가 지금 복권에 당첨되어 있으면 지극히 희박한 복권 당첨도 현실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느낄 수 있는 것 아니냐?’ 라는 논리이지요.

그런데 이런 논리에는 분명한 문제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여러분이 마약 범죄를 저질러 체포되어 100명의 포수 앞에서 총살형을 당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고 가정합니다. 100명의 포수가 총을 쐈는데 총알이 다 비껴나가서 여러분이 죽지 않고 살아나갔다고 가정합시다.

여러분은 이 상황에서, ‘포수 100명이 정조준해서 총을 쏴도 과녁을 비껴나가는 일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야. 내가 총알을 한발도 안 맞고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거니까.’ 라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이것이 합리적인 생각입니까?

어떤 원인에 의해, 100명의 포수가 모두 의도적으로 여러분을 맞추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습니까? 이런 류의 논리적 오류는, 확률적으로 희박한 사건이 발생하면, 그 사건의 발생 자체만으로 희박한 확률의 가능성을 결과론적으로 임의로 묵과해버리는 데에 있습니다. 이런 식의 접근법은, 앞서 설명드린 가설 검정의 기본 원리 자체를 완전히 무시해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지요…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신이 없다고 가정하면, 우주의 미세 조정은 물리적 필연성이나 우연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이고, 신이 있다고 가정하면, 우주는 신의 정교한 디자인에 의해 설계되었다.
  2. 우주의 정교한 상수에 관한 수학적, 물리학적 증거는 우연에 의해 창조되었을 가능성이 지극히 희박함을 반증한다. 따라서, 우주의 미세 조정은 우주는 물리적 필연성이나 우연에 의해 창조되지 않았고 정교한 설계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3.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

6.8. 도덕률이 증거하는 신의 존재

신의 존재를 시사하는 귀납적인 증거 중 또 한가지는 '도덕률’을 들 수 있습니다. 인간 사회에는 국가와 시대 문화를 불문하고 보편적인 도덕률이 존재하는 것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세부적인 가치에 있어서는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보편적인 커다란 가치들, 이를 테면, 사랑, 자비, 용서, 헌신, 정직과 같은 가치는 '선’이라고 여겨지고, 살인, 폭력, 질투, 시기 등과 같은 가치는 '악’이라고 여겨진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무신론, 유물론적인 관점에서는 지성적이거나 선한 혹은 악한 신의 속성을 인정하지 않고 이 세상의 가치는 랜덤하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절대적인 선이나 악의 개념은 존재할 수 없으며, 선이나 악의 개념 모두 개인의 선택이나 취향 환경의 산물로 설명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도덕을 '인간 사회의 교육적 산물’이라고 규정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런 보편적인 도덕률이나 선악에 대한 개념은 사회적 관습이나 교육에서 전적으로 유래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지요. 왜냐면, 모든 사람이 '양심의 가책’이라는 것을 실제로 체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살인을 미덕으로 교육받아도, 실제로 살인을 할 때 느껴지는 부정할 수 없는 죄책감과 양심의 존재는 '보편적인 선악’이나 '도덕률’이라는 것이 전적으로 유물론적인 진화나 교육의 산물이 아님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객관적 가치는 정말로 존재하고 우리 스스로가 깊이 성찰해 보면 그것이 단순한 진화나 교육의 산물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논증을 펼칠 수 있습니다.

  1.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객관적 도덕 가치는 존재할 수 없다.
  2. 객관적 도덕 가치는 실제로 존재한다.
  3.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

6.9. 요약 및 결론

지금까지 신의 증거를 확인할 수 있는 귀납적인 방법론과 그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2가지 예(우주의 미세 조정, 도덕률)을 살펴보았습니다. 앞의 포스팅에서 다룬 신의 증거를 확인할 수 있는 연역적 증거를 함께 고려하면,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영역에서의 뿐만 아니라, 현대 물리학적인 증거와 윤리학적인 증거들을 통해서도 신의 존재 가능성을 합리적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확인했다면, 적어도 '신’이라는 존재의 가능성을 지지하는 것은, 단순히 못배우고, 무식하고, 과학을 모르는 광신적인 종교인들의 억지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아셨을 겁니다.

오히려 반대로, 자신이 똑똑하고, 과학적이고 이성적이며 지성인이라고 생각하면서 막연하게 '무신론’과 '유물론’이 지성적이고 합리적이고 과학적이고, 논리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이 얼마나 어이가 없는 궤변인지 조금은 아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이 글을 통해서, 적어도 완벽하게 신의 존재를 확신하지는 못하더라도, '막연한 무신론’이나 '유물론’이 얼마나 억지스럽고 터무니없는지를 깨달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적어도 '신’이 어쩌면 실제로 존재할지도 모르겠다는 정도의 생각의 변화가 일어났다면, 다음 단계에서는 보다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증거가 필요할 것입니다.

라는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그런 증거는 과연 없을까요? 바로 확인해 봅시다.

7. 신 존재의 증명 (현실적 증거)

7.1. 현실적인 신의 증거

지금부터는 좀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신의 증거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앞서 우리는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에 의해 '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이 인간에게 자신의 존재와 능력을 ‘직접’ 보여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신이라는 존재를 사변적이고 학문적인 방식으로만 확인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이 자신의 존재를 인간이 직접 경험하고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드러낸다면 우리는 신의 존재를 훨씬 더 경험적이고 실제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앞서 검증해본 어려운 철학적 사유 과정이 결코 '공허한 지적인 사고의 산물’이 아닌 '현실적인 증거’로 확신할 수 있게 됩니다. 이는 앞서 살펴보았던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신 존재의 확실성을 지지하는 강력한 추가적인 증거가 됩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지요. 어떤 원리를 복잡한 물리학적, 수학 공식으로 아무리 확증하고 이해한다 하더라도 실험을 통해서 직접 체험하고 관찰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확실한 진리로 '체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이론이 실제로 검증이 되면, 우리는 비로소 그 원리를 명쾌하게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지요.

'신’은 존재한다라는 결론까지 얻는다고 하더라도, 아주 중요한 문제가 하나 남아 있는데, 그것은 어떤 신이 참 신이냐는 것입니다. 제가 이 글들을 통해 여러분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신은,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왜 기독교의 하나님만이 참 신이고, 다른 신은 가짜 신이냐라는 부분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가야할 것입니다.

일단은 우선 우리가 어떤 방법을 통해 어떤 신이 참 신인지를 알 수가 있는지의 문제부터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전제 조건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신이 인간이 체험하고 관찰할 수 있는 형태로 자신의 존재와 능력을 보여주지 않으면 우리가 어떤 신이 참신인지를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단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신이 가만히 있으면 우리가 검증할 수단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일단은 검증의 기준이 되는 신이라면 반드시 자신의 존재를 인간에게 내보여야 하고, 그에 합당한 신적인 능력을 인간이 실제적으로 체험할 수 있어야 하며, 그에 대한 객관적인 증거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신들을 한 번 나열해 볼까요? 기독교의 하나님, 이슬람교의 알라, 고대 근동의 바포멧, 그모스, 몰렉, 고대 이집트의 오시리스…각 나라에 분포하는 무수한 토템신앙의 신들, 이름도 모르는 잡신들.

하지만, 단순히 '신’이라는 이름만 붙어있다고, 지금 우리가 검증하고자 하는 '온 우주’를 창조한 만물의 근원이 되는 '신’의 자격 요건에 아무나 부합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왜냐면, 절대 다수의 신들은, 그냥 인간들이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사상의 산물’인 '허구적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테면, 어떤 사람이 풍요나 다산을 목적으로 A라는 신을 상상으로 창조했다고 가정합니다. 이런 신은 우리가 현재 검증하고자하는 신과는 전혀 관계가 없지요. 엄밀한 의미에서 그런 것은 '신’이 아닙니다. 그냥 인간의 창작물이지요.

이런 기준을 들이대면, 절대 다수의 '신’들은 자격 미달입니다. 적어도 최소한 진짜 '신’이 맞는지 아닌지 검증할 수 있는 자격이라도 갖추려면, 그 '신’적인 존재가 자신의 존재와 능력을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보여주었다는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이게 예선입니다. 무수한 '신’들 중, 인류의 역사상 이런 검증가능한 증거가 가장 체계적면서도 방대한 양으로 축적되어 있는 '신’은 바로 성경에서 언급하는 '하나님’입니다.

우선, 성경에 언급된 하나님은 자신의 존재를 이렇게 기술합니다.

7.2. 성경의 하나님을 검증하는 방법

하나님이 인간에게 드러낸 자신의 존재와 신적인 능력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일단은 우리가 가장 '유명한 신’인 성경의 하나님에 대한 신빙성부터 객관적인 증거들을 통해 직접 검증해보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그것의 진위 여부를 판단해 본 뒤, 동일한 검증과 증거를 다른 '신’들과 경전에도 적용해 봄으로써 어떤 신이 참 신인지를 검증해 볼 수가 있겠지요?

성경의 하나님이 진짜 존재하는 참 신인지를 검증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앞서 살펴본 검증 방법을 적용하면 됩니다.

우선 '성경의 하나님이 참 신이다’라는 가설을 세웁니다. 만일 이 가설이 참이라면,

는 내용도 참임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를 입증할 수 있는 여러가지 증거를 수집하여 사실을 검증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만일, 수집된 증거와 사실들이 위의 내용을 반박하거나 모순이 존재한다면, '성경의 하나님은 참 신이다’라는 가설은 기각됩니다. 따라서, 성경은 조작된 문서이고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겠지요.

하지만, 검증 과정에서 모든 증거와 논리가 성경의 진실성과 하나님의 존재를 지지한다면, 성경은 진실을 담은 역사적 문서이며, 하나님도 실제로 존재한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럼 하나씩 검증해볼까요? 앞서 살펴본 우주론적 신의 논증의 근거를 살펴보면, 우주만물을 창조한 절대적인 '존재’가 있어야 함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 존재는 시공간을 초월한 존재여야 함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우주의 정교한 미세 조정과 도덕률의 존재를 고려하면, 지성적이면서도 인격적이고, 선악의 개념이 분명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성경의 하나님의 속성은, 우리가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러한 사실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 중 아직 논의에서 해결되지 못한 내용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인간을 창조했으며, 인간의 기도에 응답하기도 하며, 인간의 삶에서 초자연적인 기적과 능력을 보여주고, 자신의 존재를 예수님을 통하여 인간에게 직접 드러내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것들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해결해야만 합니다.

이를 객관적인 방법으로 검증해 봄으로써, 성경의 하나님이 허구인지 진실인지를 확인해 볼 수 있겠죠? 이에 대한 세부적인 검증을 순서대로 진행해봅시다.

8. 기적은 가능한가?

8.1. 비상식적이고 초자연적인 기적, 과연 가능한가

여러분은 상식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하거나, 심지어는 이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보십니까? 그런 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믿는 분도 계시겠지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라고 믿는 분이 대다수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를 들어, 만일 제가 여러분께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가정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나뭇가지에서 사과가 떨어졌는데 땅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고 하늘 위로 솟구쳐 올라가는 것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믿어주세요!

아마 여러분 중 대부분은 믿지 않을 것이고, 아마 제게 이렇게 이야기 할 것입니다.

'만유 인력의 법칙이라는 '자연 법칙’이 존재하므로, 사과는 땅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다. 이것은 분명한 '과학적 법칙’이므로, 사과가 하늘 위로 올라가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당신의 주장은 거짓이고, 있을 수도 없다. 당신이 헛것을 보았거나, 정신병에 걸려 횡설수설하거나, 아니면 모종의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즉, 한 마디로 요약하면, '비과학적’이기 때문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라는 것이죠. 이 논리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과학적=논리적=합리적=현실적=가능, 비과학적=비논리적=비합리적=비현실적=불가능이라는 사고방식이 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8.2. 기적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의 오류

과연 ‘비과학적’ 혹은 '비상식적’인 현상이나 기적은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정말로 일어날 수 없는 것일까요? 바로 위에서 여러분이 제시한 믿음의 근거가 과연 옳은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위와 같은 생각 (비과학적, 비상식적이기 때문에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은 크나큰 ‘논리적’ 오류(순환 논증의 오류)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과학적인 법칙은 수많은 자연 현상을 관찰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규칙성’을 발견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일단 이 공통적인 규칙성을 찾아내면, 역으로 이 규칙성을 기존에 관찰하지 않은 다른 자연 현상에 적용해봅니다.

만일, 거기서도 역시 이 규칙성이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을 확인하면 '자연 법칙’으로 확립되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자연 법칙으로 확립된 것들은 모두 귀납적 테스트 뿐만 아니라, 연역적 테스트까지 패스한, 2중 시험을 모두 통과한 것들입니다.

하지만, 과학적 법칙이 이런 꼼꼼한 2중 테스트를 통과했다고 해서, '절대적 진리’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과학적인 법칙은 소위 세테리스 파리부스(Ceteris Paribus),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 라는 전제를 암묵적으로 깔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연 법칙대로 현상이 발생하는 데에는 다른 자연적, 혹은 초자연적 요인이 전혀 간섭하지 않는다는 가정도 암묵적으로 깔고 있습니다. 모든 자연 과학의 법칙은 이 2가지 전제를 암묵적으로 깔고 있습니다.

앞의 예에 적용을 해볼까요? 사과가 하늘 위로 올라갔다는 제 말을 못 믿겠다는 여러분의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라 사과는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므로 당신의 주장은 거짓이다’

하지만 사실 이를 좀 더 구체화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지구의 질량이나 그 외 기타 모든 만유 인력의 법칙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모든 자연적인 조건이 동일하고 불변하다고 가정하자. 또한, 이 법칙을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존재의 개입도 없다고 가정한다면, 만유인력의 법칙이라는 과학적 법칙에 따라 사과는 항상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므로 당신의 주장은 거짓이다.

즉, 여러분이 제가 거짓말쟁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만유 인력의 법칙에 위배되기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주장하면 안됩니다. 왜 모든 자연적인 조건이 동일하고 불변하며,초자연적인 요인이 간섭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지 전제 조건을 증명해야 합니다. 왜냐면, 자연 법칙은 이 두 가지 전제 조건을 기본적으로 깔고 있는데, 사실 이것은 증명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전제 조건은 과학을 신봉하는 사람의 '믿음’의 영역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과학은 증거의 영역이지 믿음의 영역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현상을 설명하는 과학적 논리는 검증이 가능한 합리적 영역에 속하지만, 과학적 사실의 2가지 암묵적인 전제는 증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믿음의 영역에 속합니다.

혹시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하십니까?

'원래 자연이라는 게 변하지 않는게 당연한 거 아니냐? 원래 규칙성이 존재하기 때문 아니냐? 신은 원래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신다면 여러분은 '순환 논증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자연의 조건과 법칙은 불변하냐라고 물었더니, 원래 자연이 불변하니까 라는 논리이죠. 왜 당신이 축구를 좋아하냐고 물었더니 '나는 축구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얘기하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셀 수 없이 수많은 자연 현상이 우리가 발견한 규칙성으로 설명된다고 해도, 까탈스럽께 따지고 보면, 이 규칙성이 다른 자연 현상에 '반드시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논리적인 보장’은 없습니다.

단지 수많은 자연 현상의 관찰을 통해 그런 규칙성이 다른 자연계에도 동일하게 나타날 것 같은 심리적인 믿음과 경험적인 높은 확률만 있을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과학’은 '믿음’이 아니라, 객관적인 '진실’이라고.하지만, 결국, 과학이나 자연 법칙도 결국은 이 '세테리스 파리부스’가 맞고 초월적인 존재의 개입이 없다는 '믿음’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이 전제 조건들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경험적 추정할 수는 있어도, 이것이 절대 진리인지에 대한 '논리적인 확증’은 불가능합니다.

결국은 이 과학도 두 가지 가정이 맞다는 믿음에 근거한 합리적인 규칙성입니다. 이 두가지 전제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과학 법칙도 '절대 진리’가 아닌 것이지요. 다만, 절대 다수의 자연 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일 뿐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가 지금 얘기하는 것은 모든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기적적인 현상들이 다 참이고 현대 과학은 거짓이라고 얘기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절대 다수의 현상은 자연 법칙에 따라 움직이므로, 초자연적이거나 기적적인 일들이 발생했다고 하면, 일단은 뭔가 잘못된 것이 있지 않느냐라고 의심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합리적입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현상이 '결코 없다’라고, 가능성 자체를 완전히 부인하는 시도가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자연 과학의 법칙을 여러분이 생각하는 '절대 진리’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일단 신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으며, 현재의 자연 조건이 불변할 수도 있고 변할 수도 있다는 두 가지 전제 조건을 모두 가정해야 합니다.

이 상태에서 자연 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절대 진리’로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신이 있는지 없는지, 자연조건이 불변할지 변할지는 아무도 논리적으로 확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연 법칙은 '초자연적인 '신’의 개입 여부나 'Ceteris Paribus’가 틀릴 가능성은 기본적으로 차단하고 있습니다. 'Ceteris Paribus’가 참이고 신적인 존재의 개입은 없다는 가정만 포함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자면 자연 법칙은 '절대 불변의 진리’라고 결코 단정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과학적인 법칙은, 자연적인 조건이 불변하고 신의 개입이 없는 상황에서만 나타나는 다수의 자연 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있는 매우 훌륭하고 이성적인 수단은 맞지만, 논리적으로 완전무오한 절대 진리는 아닌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과학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거나 거짓이라는 주장은 논리적 오류입니다.

8.3. 성경의 기적은 거짓인가?

이런 관점에서, 성경에 나오는 아래와 같은 수많은 비과학적인 기적들을 어떻게 받아들이시겠습니까?

'Ceteris Paribus’가 참이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가 참이라고 가정하면, 이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이 두가지 가정이 참이라면, 성경의 사실은 모두 날조된 판타지 소설이자 허구에 불과한 것이 분명하겠죠.

하지만, 'Ceteris Paribus’가 성립하지 않고,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고, 자연 법칙을 만든 전지전능한 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이런 '초자연적인 기적’이 기적일까요? 사실 기적도 아니죠? 우주를 창조하고 자연법칙 자체를 설계한 신이 존재한다면 바닷물 좀 가르고 죽은 사람 살리는 게 대수이겠습니까? 비합리적이고 비상식적인가요? 오히려 이런 존재가 자연 법칙을 지배하지 못한다는 것이 논리적 오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여러분이 절대 진리로 신봉하는 자연 과학의 법칙도 결국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기적이나 신의 존재가 자연 과학의 법칙에 위배되기 때문에 부인하는 것은 '신이 없는 이유는 신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순환 논증의 오류를 범하고 있을 뿐입니다.

과학적으로 모순이 되기 때문에 기적을 부인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여러분이 기적이 불가능하고 신이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진짜로 저런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기적이 나타났을 경우, 그것이 진짜인지 아니면 단순히 헛것을 보았거나 과학적인 오류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다양한 방법으로 '현상 자체’를 검증해서 진위를 판단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앞의 예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여러분이 '사과가 땅에서 하늘 위로 올라갔다’라는 제 주장이 거짓임을 밝히기 위해서는, '원래 모든 사과는 만유 인력의 법칙에 따라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해서는 안됩니다. 대신, 직접적으로 제 관찰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제 시력에 이상이 있었고, 헛것이나 환상을 볼 정신적인 이상이 있었다는 증거들을 제시해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런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면, '기적’이나 '신적인 존재의 개입 가능성을 '분명히 인정’해야 합니다. 또한, 과학적인 법칙의 전제 조건이 틀렸음(기적이 가능하고 신은 존재한다)도 겸허하게 수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적이나 신적인 존재가 있을 수 없다고 가정한 상태에서 어떤 현상이 합리적으로 도저히 설명이 설명되지 않는 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그 전제가 틀렸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죠.

반대로, 제가 환각상태에 빠졌다는 객관적인 증거가 발견된다면,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신적인 존재가 없이 얼마든지 자연법칙으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따라서, 저의 주장은 묵살되고 기적이나 신의 존재 가능성은 떨어진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기적, 신적인 존재의 가능성에 대한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접근 방식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사실이 거짓임을 밝히기 위해 '한 번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는 것이 자연 법칙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근거로 들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현상 자체가 거짓’임을 역사적인 기록이나 정황 등을 통해 직접적으로 밝혀야 합니다.

여기서 모든 사실이 '실제 역사적 사건’이었음이 증명된다면, 초자연적인 기적이나 신의 존재를 인정해야 합니다. 반면 역사적인 날조나 허구였음이 드러난다면, 기적도 없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의 기적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검증하는 유일한 대안은 성경의 기적이 '역사적으로 실제로 발생한 사건’인지 아닌지 그 사실 자체를 직접적으로, 다양한 각도에서 검증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만일 믿기 어려운 기적과 신의 존재에 대한 객관적인 근거와 역사적인 확증 자료가 발견된다면, 기적과 신은 존재한다는 대전제를 수용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기적과 신은 허구가 되고 자연법칙에 의해서만 모든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를 밝히기 위해서는 온갖 기적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쓰여진 책인 성경의 진위를 치밀하게 검증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모든 요소를 비판적으로 따져보고, 이것이 진실인지를 사실 자체를 직접적으로 가려야 합니다. 이게 진정으로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접근 방법입니다.

과학은 '믿음’이 아니라 '객관적인 절대 불변의 진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설령 현재의 수준으로 이해되지 않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있다 하더라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지금은 밝혀지지 않은 '과학’이 증명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 그렇다는 보장은 결코 없습니다.

결국은 과학도 'Ceteris Paribus’나 초자연적인 신의 개입의 가능성에 대한 부정이라는 전제 조건에 대한 '근거없는 믿음’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 잊지 마십시오. 과학도 결국은 '믿음’입니다.

절반은 믿음이요 절반은 합리적인 논리로 구성된 사상 체계 입니다. '신은 없다’를 자체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면서도 '신은 없다’라는 전제를 참으로 인정하고 들어가는, 매우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긴 하지만, 불완전한 사상 체계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기적은 비과학적이고 비상식적이기 때문에 불가능하고,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코 단정할 수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기적적인 현상이나 초자연적인 현상이, 신적인 존재가 있다고 가정했을 때 합리적으로 설명된다면, 신적인 존재나 그에 의한 개입 또한 논리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과학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사건이나 현상이 발생했다고 주장하는 핵심 근거인 성경이라는 것이 어떤 책이고, 과연 여기서 주장하는 황당한 신화적인 이야기가 역사적인 사실이었는지에 대해서 심층적으로 따져보겠습니다.

9. 성경의 본질과 역사성에 대한 의문

성경에는 수많은 기적, 초자연적인 현상들이 난무합니다. 여러분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되고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대체 이것을 무슨 근거로 믿어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하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아마 항상 이런 답변을 들으셨을 것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신화가 아닌 역사적인 사실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며,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주장 역시 순환 논증의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답변을 하려면 '왜 성경이 신화가 아닌 역사적인 사건이고, 진리이며, 하나님의 말씀인가’에 대한 객관적인 근거를 들어야 합니다. 이를 증명하지 못하면, 왜 성경만 믿어야 하고, 다른 수많은 고대설화는 믿지 말야야 하는지에 대해 올바로 반박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는 과연 그러한 객관적인 근거가 있는지 확인할 것입니다.

9.1. 성경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

본격적으로 살펴보기에 앞서 일단 여러분이 미처 알지 못하는 성경에 대한 객관적인 몇가지 사실을 알아보겠습니다.

  1. 성경은 BC 1,500년부터 AD 100년까지 약 1,600년 동안 수많은 저자들(약 40명)에 의해 기록된 책으로, 총 66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2. 성경은 특정한 사람이 자신의 생각대로 마음대로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지자들과 사도들, 예수님을 통하여 계시와 영감으로 쓰여진 책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주께서 가라사대”, “주의 말씀이 임하여 가라사대” 라는 표현이 구약 성경에 적어도 3,000번 정도 언급되었으며, 많은 경우 직접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24:12, 신명기 10:1-2).
  3. 성경은 꾸며낸 창작물이나 소설이 아닌, 역사의 기록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에 믿을 수 없는 초자연적인 기적이나 신에 의한 역사들이 난무하기 때문에 믿기 힘들다고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의 기록 자체를 '소설’이나 '신화’의 장르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주 무식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대부분은 이스라엘과 유대민족의 왕과 역사를 지극히 상세하게 다루는 전형적인 역사서의 서술 형식을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의 인물과 유물, 기타 고대 문서를 통해 성경에 나온 사건들이 당시의 시대적인 역사와 완벽하게 부합하는 것임이 고고학적으로 입증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과 예수님에 대한 역사적, 고고학적 증거에 대해서는 이후에 자세히 살펴볼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지만, 이와 같은 성경에 대한 객관적인 '팩트’는 인정해야 합니다.

9.2. 성경의 신뢰성을 검증하는 방법

그렇다면 지금부터,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진리’라는 종교적인 선입견과 편견을 완전히 배제한 상태에서 성경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만을 근거로 성경은 믿을만한 책인지 조사해보겠습니다. 기준은 다음의 4가지입니다.

  1. 성경 자체의 고고학적 신뢰성과 역사성
    • 성경은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기록된 '역사적 사실’인가 아니면 단순히 오래 전에 사람의 생각으로 꾸며 낸 고대 종교 경전인가?
    • 어떤 근거로 성경이라는 고대 문서를 신뢰할 수 있는가?
    • 성경 자체의 기록은 객관적인 기준에 비추어 볼 때 신뢰할 수 있는가?
  2. 기타 문헌에 의한 증거
    • 성경에 기록된 사실을 증거하는, 다른 문서가 존재하는가?
    • 기타 문서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이 성경의 내용과 부합하는가?
    • 성경은 인위적으로 조작되거나 역사적 사실을 다르게 기록할 가능성은 없는가?
  3. 고고학적 증거
    • 성경에 나오는 사건, 지명, 유적에 관련된 실제적인 고고학적 증거가 있는가?
    • 고고학적으로 밝혀진 역사적 사실들은 성경의 내용을 지지하는가?
  4. 성경 내용 자체의 신뢰성
    • 성경의 내용에 자체적인 모순이나 오류는 없는가?
    •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는가?
    •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었는가?
    • 현재 남아 있는 예언과 현재의 상황은 어떠한가?

그럼 순서대로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10. 성경의 고고학적 신뢰성과 역사성

10.1. 역사적 기록의 진위를 판정하는 기준

2,000여년 전에 쓰인 고대 문서의 사실성과 진위 여부는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좀 더 일반적으로 질문한다면, 고대 문서나 어떤 역사적인 기록에 대한 대한 역사성과 진위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여러분이 제 2차 세계 대전을 겪어보지도 않았으면서 1939년에 실제로 일어났다고 믿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수많은 역사적인 기록물과 증거가 남아 있고, 비록 많지는 않지만 아직까지도 그 전쟁을 직접 겪고 아직까지 생존해 있는 사람의 증언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역사적인 기록과 증언만 확인되었다면 우리는 과연 이것을 모두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그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역사적인 기록이 거짓일 수도 있고, 조작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며, 증인도 거짓말을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떤 역사적인 기록이나 증언의 사실성 및 진실성을 합리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요? 고고학이나 역사학에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과 기준을 적용합니다. 알고 보면 대단히 상식적인 것들입니다.

즉, 어떤 사건의 발생시기와 기록연대의 간격, 기록물 및 사본의 양, 동일한 사건을 보고하는 기록의 존재등의 요소가 고대 문서나 역사적인 사건의 진실성을 가리는 객관적인 기준으로 일반적으로 널리 이용되고 있습니다.

10.2. 성경의 고고학적 신뢰성

그렇다면 과연 성경은 이 모든 테스트를 통과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성경은 이 모든 까다로운 시험을 통과했음이 '문서학적’으로 입증되었습니다. 그것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말입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성경을 2,000여년 전에 기록된 고대 문서로 간주하고, 역사적인 문서의 객관성과 진실성을 규명하는 방법인 ‘고서 검증법’ 을 이용해서 검증해보겠습니다. 고서 검증법이란 원본이 없는 경우 현재 갖고 있는 사본들끼리 서로 비교하여 보아 원본(기록된 사건이 발생한 시점과 가장 근접한 시기)과의 정확성을 알아보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에 의하면 사본의 수가 많을수록, 사본이 원본으로부터 만들어진 시간적인 차이가 적을수록, 사본간 오류가 적을수록, 사본은 원본과 일치도가 높다고 인정합니다.

이는 고고학에서 널리 이용되고 있는 방법으로, 원본이 없는 대부분의 모든 고대 문서나 사본에 이용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가진 구약이나 신약 성경은 지금부터 무려 4,000년 또는 2,0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므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원본은 하나도 없습니다. 따라서, 성경의 신뢰도를 알아보는 객관적인 방법으로 고고학자들이 이용하고 있는 고서 검증법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고서 검증법을 통해 '객관적’으로 확인한 성경의 정확성과 신뢰도는 결론적으로 '믿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위의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시키고 있으며, 현존하는 그 어떤 고대 문서보다도 정확도와 신뢰도가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신약 성경의 일부 또는 전부를 포함한 현존하는 사본은 약 5,500여 개, 번역 사본이 약 18,000여 개로 모두 25,000여 개의 사본이 남아 있습니다. 신약 성경과 비교하는 데 가장 좋은 대조 서적으로는 호머(Homer)의 일리어드(Illiad)가 이용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신약 성경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암기되고 또 비문에 적히기도 하며 후세 사람들에게 베껴져 전해졌듯이, 호머의 일리어드도 많은 사람들에게 애송되어 지금까지 전해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경을 제외한 고대 문서 중 일리어드가 사본의 수와 정확도에 있어서 고고학적으로 가장 신뢰도가 높은 이유도 있습니다.

내용 신약성경 일리어드
사본의 수 24,643 643
원본기록연대 AD 40-100 BC 900
최초사본연대 AD 125 BC 400
원본 - 최초 사본 시간 차이 25년 500년
사본간 오류 0.5% 5%
저자 (책이름) 원문 연대 최초 사본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BC 340 AD 1100
줄리어스 시저 (갈리아 전쟁기) BC 50 AD 900
헤로도투스 (역사) BC 435 AD 900
호머 (일리아드) BC 900 BC 400
투키티데스 (역사) BC 400 AD 900
플라톤 (테아이테토스) BC 350 AD 800
구약성경 BC 1400 ~ 400 BC 125
신약성경 AD 75 AD 125

이 두 책을 고서 검증법에 따라 서로 비교하여 표를 만들어 보면 위와 같습니다. 신약 성경의 사본들은 고대의 어떤 사본들보다도 단연 오래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역사가 카툴루스(Catullus)의 책은 3개의 사본만 현존하는데 원본 이후 100년 후에 만들어진 것이며, 헤로도투스(Herodotus)도 8개의 사본만 현존하는데 원본 이후 1,300년이나 지나서 기록되었습니다.

위의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신약 성경은 대조 고서인 일리어드에 비해 사본의 수에서는 40여 배, 시간적인 차이에서 20 배, 그리고 오류의 정도는 10 배 정도 더 신뢰도가 높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언급하는 사본간 오류는 인쇄술이 발명되기 이전 책을 사람인 손으로 일일이 베껴쓰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실수였습니다. 성경에서 발견된 오류는 절대 다수가 단순한 철자상의 실수나 오기, 관사나 정관사 같이 본질적인 내용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는 사소한 오류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성경이 일리어드보다 무려 약 8,000여 배 이상이나 신뢰도가 높은 것임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약 성경은 인류가 갖고 있는 어떠한 책보다도 원본에 가깝고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책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브루스(F. F. Bruce)는,

신약 성경의 증거는 고전 작품에 대한 증거보다 훨씬 많으므로 그 신빙성을 의심할 수 없다

고 말한 바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어떨까요? 구약 성경의 가장 오래된 번역 사본은 오랫동안 AD 900년경의 마소라 사본(Masoretic Text)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구약 성경의 정확도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의심을 해왔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이 마지막으로 기록된 BC 400년경과 AD 900년과는 무려 1,300년이라는 긴 시간적인 차이가 나는 셈이므로, 조작 가능성이나 사본의 정확도에 대부분의 학자들이 의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

더욱이 구약 성경의 히브리어 사본은 구약이 완성된 이후 1,4000년이나 지난 AD 1008년의 바빌로니쿠스 서판(Codex Babylonicus Petropalitanus) 뿐이어서, 그 때까지 성경학자들은 바빌로니아의 점토판이나 이집트의 파피루스를 유일한 자료로 활용했습니다.

그런데 1954년 베두인(Bedouin) 목동이 우연히 BC 125년경 쯤에 제작된 사해 사본(Dead Sea Scroll)을 발견함으로써 원본과의 차이를 275년으로 좁혀 놓았습니다. 40,000여 개의 사본 조각들로부터 500여권의 책이 구성되었는데 이 중 1/3이 구약 성경이었고, 에스더서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구약 성경 전체가 발견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사해 사본과 1,000여 년의 간격을 두고 만들어진 마소라 사본과 서로 비교해 보았더니, 이 둘이 서로 정확하게 일치함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고서 검증법에서 기준으로 삼는 사본의 수, 사본간 정확성, 원본과 최초 사본간의 저작 시간 간격(최초 사건 발생 시점과 사본 간의 시간 간격)에서 지구상에 현존하는 모든 고대 문서 중 정확성이 압도적으로 으뜸임이 객관적으로 입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신학자’들이 우겨대는 것이 아니라, '고고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입니다.

10.3. 예수의 역사성

그럼 기독교의 예수에 대한 역사적 기록과 타 종교의 인물에 대한 문서를 한 번 비교해 볼까요?

우선 명심해야 할 사실은, 고대 역사 기록들은 거의 모두가 구전 전승 기간을 거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역사적 인물의 가르침은 일정한 기간 동안 구전으로 전승되다가 후대 어느 시점에 문서로 기록된다는 점이죠.

이는 어떤 역사적 인물에 관한 기록이 생존 당시에는 굳이 기록될 필요가 없었고, 그가 역사적으로 평가받는 데에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여 나타난 현상입니다. 뿐만 아니라, 고대에는 현재처럼 자료의 기록이 수월하지 않았던 것도 중요한 원인입니다.

따라서 역사적 사건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달된 기간이 짧을수록 그 내용이 변질되지 않은 역사적 사실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수님을 고대의 인물들과 비교해 봅시다

단군 신화는 BC 2333년에 나라를 세운 단군의 이야기가 구전되어 AD 1281년에 승려 일연의 삼국유사에 기록되기까지 최소한 2000∼3000년 이상의 구전 전승 기간을 거쳤습니다. 따라서 역사적 신뢰성이 매우 낮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불교는 어떨까요? BC 6세기에 살았던 부처의 생애는 대부분 AD 1세기에 기록되었습니다. 부처의 가르침과 생애가 제자들에 의해서 구전되다가 문자로 기록된 것은 부처가 죽은 지 최소한 600년 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하마드는 AD 632년까지 생존하였는데, 그의 생애를 기록한 무하마드의 전기는 AD 767년에 쓰였습니다. 이것은 그의 전기가 그의 사후 약 135년이 지나서야 문서로 기록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공자의 생애는 어떨까요? 공자의 생애에 관한 유일한 책은 사마천의 '공자세가’인데, 공자의 생애는 공자가 죽은 지 약 400년 후에 기록되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도올 김용옥 교수는 “사마천의 '공자세가’는 어떠한 경우에도 사실로 간주될 수 없다.” “400년 전에 살았던 한 인간의 삶의 이야기를,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편년체로 세밀하게 기록한다는 것이 어떠한 경우에도 사실 그 자체일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명백하다.” 라고 말했습니다. 김용옥 교수는 공자의 생애 기록은 그 역사적 신뢰성이 매우 낮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헬라 제국을 이룩했던 알렉산더 대왕은 어떨까요? 그의 생애는 그가 죽은 지 약 400년 후에 아리안과 플루타르크에 의해서 쓰였습니다. 타키투스와 수에토니우스에 의해 기록된, 예수님과 동시대의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는 그의 사후 약 80년 후에 기록되었습니다. 또한 디오 카시우스에 의해 기록된 티베리우스 황제의 역사는 그가 죽은 지 약 190년 후에 쓰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 로마 황제와는 도저히 비교될 수 없는 이스라엘의 무명 청년, 예수님에 관한 기록은 언제 쓰였을까요? 사복음서는 예수님이 죽고 부활한 후 약 30년에서 60년 사이에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은 예수님의 죽음 후 약 18년에서 35년 사이에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신약 성경 기록은 예수님의 죽음 후 약 18년에서 60년 사이에 문서로 완성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에 관한 역사 기록은 가장 짧은 구전 전승 기간을 거쳤고 이는 그분의 기록이 고대 동·서양의 문헌들 중에서 가장 탁월한 역사 기록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이 세상에 살았던 고대 인물 중에서 가장 확실한 역사적 신뢰성을 가졌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다른 고대 인물들과는 달리 예수님에 관한 기록 중 일부는 그의 죽음과 부활을 본 500명 이상의 목격자 대부분이 살아있을 때 기록되었습니다(고린도전서 15장). 따라서, 만일 누군가가 예수님의 역사성을 부인한다면 그는 반드시 다른 고대 인물들에 대한 역사적 신뢰성도 모두 다 부인해야만 할 것입니다.

로마와 유대, 이스라엘, 나아가 중세 유럽 전체과 전 세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예수님의 역사적 실존이나 행적을 믿지 않는 것은 '역사적 무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10.4. 성경이 거짓일 경우 발견되는 현상

성경이 역사적인 사건을 기록한 책인데, 누군가가 조작하거나 거짓으로 기록할 의도가 있었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즉, 누군가가 조작하거나 의도적으로 역사를 왜곡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면, 적어도 이 3가지 테스트 중 어느 하나에서라도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테스트를 성경은 아주 완벽하게 통과했고 이는 곧 문서학적인 관점에서는 성경의 조작이나 역사를 왜곡했을 가능성이 지극히 낮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10.5. 합리적인 의심

많은 사람들은 성경에 믿기 힘든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성경은 누군가가 조작하거나 꾸며냈을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치명적인 문제는 그러한 추측에는 방금 살펴본 바와 같이 아무런 객관적인 근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마 이런 의문을 가지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어떤 과정을 통해 이처럼 정확하고 확실하게 기록되고 전승되었는지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 이 사실을 아셨다면, 성경은 '분명히 역사적으로 믿을만한 문서’라는 '객관적인 사실’을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성경이 믿을만한 객관적인 역사 문서임을 확인했다면, 다음 단계는 성경 이외의 다른 역사 문서나 고고학적으로 밝혀진 사실들이 성경의 사실을 확증하는지 반대하는지를 알아보면 될 것입니다.

만일, 성경 이외의 기타 문서나 고고학적인 발견도 성경을 지지한다면, 성경은 단순히 ‘역사적으로 믿을만한 문서’ 수준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신뢰도 높은 문서’로 간주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이 이 단계마저 통과한다면, 성경 자체의 내용상의 역사적인 불일치나 성경에 나온 수많은 예언들이 과연 이루어졌는지를 따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단계까지 다 통과를 해버린다면, 성경은 '정직한 역사적 진실’임을 여러분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과연 성경이 나머지 테스트마저 다 통과해버릴지 확인해 봅시다.

11. 기타 문헌에 의한 증거

앞서 성경은 동서양의 그 어떤 고대 문서보다 압도적인 ‘고고학적’, ‘문서학적’ 정확성 및 신뢰성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해 볼 수 있습니다. ‘정말로 성경이 역사적인 사건을 정직하게 기록한 책이라면, 성경에 기록된 사실을 증거하는 다른 문서가 존재하거나, 그 문서에 기록된 내용이 성경의 내용과 일치하는가?’

성경에서 다루는 이스라엘과 유대의 역사는, 천지창조를 제외하고 아브라함의 시대부터 보면 BC 2100여 년부터 시작되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한 AD 33년을 거슬러 사도들이 활동하고 순교한 1세기를 전후한 시점을 포함한 기간입니다.

2,000여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이 중 가장 중요하면서도 논란이 많은 부분이 바로 예수님의 사역과 십자가 죽음, 부활에 관련된 역사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수많은 예언은 결국 예수님의 출생과 사역, 죽음, 부활을 다루고 있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복음의 핵심이자 성경에서 단연코 가장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는 과연 예수님의 사역과 십자가상의 죽음, 이후의 부활에 대해서 성경 및 다른 역사적 기록에서 어떻게 기술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그 기술이 서로 일치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1.1.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비기독교 문서

예수님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은 성경 외의 고대 문서(성경과 무관한 비기독교 문서)에도 많이 존재합니다. 대표적인 것들만 몇 개 살펴보겠습니다.

요세푸스의(AD 37 ~ 100년 이후) 기록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유대인의 역사가였다가 로마에 항복하여 로마의 문필가가 된 인물입니다. 요세푸스는 AD 93년에 그가 쓴 ‘유대 고대사’ 에서 예수님에 대하여 2회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즈음에, 굳이 그를 사람으로 부른다면, 예수라고 하는 현자 한 사람이 살았다. 예수는 놀라운 일을 행하였으며, 그의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선생이 되었다. 그는 많은 유대인과 헬라인들 사이에 명성이 높았다. 그는 바로 그리스도(구세주)였다. 빌라도는 우리 유대인 중 고위층 사람들이 예수를 비난하는 소리를 듣고 그를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명령했으나, 처음부터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않았다. 예수가 죽은지 사흘째 되는 날, 그는 다시 살아나 그들 앞에 나타났다. 이것은 하나님의 예언자들이 이미 예언했던 바, 예수에 대한 많은 불가사의한 일들 중의 하나였다. 오늘날에도 그를 따라 이름을 붙인 족속, 즉 그리스도인이라는 족속이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다.(유대 고대사 원문 18:63-64)

62년 대제사장 아나누스가 이끄는 산헤드린이 "그리스도라고 불리우는 예수의 형제 야고보"를 돌로 쳐죽이는 일을 기록하고 있다. 야고보의 죽음을 부당하게 여겼던 요세푸스는 아나누스가 결국 대제사장직을 박탈당하는 것 까지 기술하고 있다. (유대 고대사 20:200)

유대인 탈무드(bSanh 43a, AD 2세기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

유월절 축제 전날 밤 사람들은 예수를 매달았다. 사십 일 전 전령이 이렇게 외쳤다. ‘그 사람은 마술을 행하고 이스라엘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여 불충한 자들로 만들었으니, 끌려가서 돌팔매질을 당할 것이다. 그를 변호할 자는 나와서 말해보라.’ 그러나 아무도 그를 변호하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유월절 축제 전날 밤 매달았다.

랍비들은 이렇게 가르쳤다. 예수에게는 마타이, 나카이, 네제르, 부니, 토다 이렇게 다섯명의 제자가 있었다. 사람들이 마타이를 끌고 갔을 때 예수는 그들(재판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타이를 처형해야 하는가?” 언제 내(마타이)가 나아가서 하나님을 뵈울 수 있을까? (시편 42:2)라고 기록되지 않았나?" 그들은 예수의 말에 이렇게 응수했다. “물론이지. 마타이는 처형될 것이야. ‘저 자가 언제 죽어서 그 이름이 없어질까?’ (시편 41:5)라는 말씀도 있으니까.”

마라 바르 사라피온의 편지 (AD 73년 직후에 쓰인 것으로 추정)
사라피온은 사모사타 출신의 시리아인 스토아 철학자로, 로마 감옥에서 아들에게 쓴 편지에서 아들에게 남겨주고 싶은 많은 권고와 경고들을 담고 있는데, 여기서 언급한 '현명한 왕’은 예수를 가리키는 것으로 기정사실화되어 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이 소크라테스를 죽여서 무슨 이익을 보았느냐? 그들이 무슨 일을 했길래 기아와 역병으로 되갚음을 당했느냐? 사모스 섬 사람들이 피타고라스를 불태워 온 나라가 한 순간에 모래로 뒤덮이게 되었으니 그들에게 무슨 득이 있겠느냐? 유대인들이 현명한 왕을 처형하고 그때부터 그 나라를 빼앗겼으니 그들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신께서는 그 세 현자들을 위하여 똑같이 복수를 행하셨다. 아테네 사람들은 굶주려 죽었고, 사모스 섬은 바닷물로 뒤덮혔으며, 유대인들은 살육당하고 자기네 나라에서 쫓겨나 여기저기서 흩어져 살게 되었다.

타키투스의 연대기 (AD 115-117)
타키투스는 AD 55/56 ~ AD 120년 경의 로마 원로원 귀족 출신의 역사가로 '연대기’로 유명합니다. 그는 연대기 13-16장에서 네로의 전기를 기술하면서 64년에 일어난 로마의 대화재와 함께 그리스도(예수님)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명칭(Christiani)는 티베리우스 황제 치하의 행정관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처형당한 그리스도(예수님)에게서 나온 것이다. 이 부패한 미신은 잠깐 동안 억눌려 있었지만 나중에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으니, 그 신앙이 처음 발생한 유대 지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혐오스러운 것과 흉악한 것들이 밀려들어와 횡행하고 있는 로마에도 세력을 뻗쳤다. 그래서 유죄를 인정한 모든 사람들에 대해 최초로 체포가 행해졌다. 그 때 그들의 정보를 바탕으로 엄청난 사람들이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도시 방화죄 때문이 아니라 인류에 대한 증오 때문이었다.

수에토니우스의 기록 (AD 117~ AD 122)
AD 70 ~ 130년 경의 기사 계급 출신으로 트라얀과 하드리안 황제시기에 고위직에 올라 시저부터 도미티안에 이르기까지 모두 열두 황제의 생애를 기술하였습니다. 클라우디우스에 대한 보도 중 25장 4절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습니다.

크레스투스(메시아를 의미하는 크리스투스의 오기로 추측됨)에 의해 미혹되어, 끊임없이 소요를 일으키는 유대인들을 그 황제는 로마에서 추방했다. 네로의 처벌은 새롭고 유해한 사교를 믿는 사람들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내려졌다.

플리니 2세의 기록 (AD 112)
플리니 2세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고 죽이는데 앞장섰던 인물로, AD 112년에 그가 소아시아의 Bithynia의 총독이었을 때 장문의 글을 트라얀 황제에게 올렸습니다. 순교자의 수가 너무 많아 믿는다고 고백하는 기독교인을 모두 죽일지 일부만 죽일지 고민했다는 내용입니다. 플리니가 당시 기독교인에 대해서 언급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새벽에 일정한 날 모이는 습관이 있고, 그리스도에게 신으로서 반복되는 찬양을 불렀고, 엄숙한 선서로서 어떤 악한 행동을 금하기로 서로 간에 약속하며 절대로 사기나 도둑질, 간음, 거짓 증거를 않으며 자신의 믿음을 부인하지 않기를 다짐했다.

터툴리안의 기록(AD 197)
터툴리안은 AD 197년에 본디오 빌라도와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간의 빌라도 보고서에 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습니다.

티베리우스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세상에 일컬어질 즈음에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정보를 그 자신이 보고받고 그 자신이 그리스도에 대해 긍정적인 결정을 하고서 이 문제를 상원회의에 올렸다. 상원은 그 의제를 승인하지 않고 기각했다. 카이사르는 그의 견해를 지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모든 비방자들을 벌할 것이라고 겁주었다.

탈루스의 기록(AD 52)
탈루스라는 역사가는 헬라어로 글을 남겼는데, 주후 30년 4월에 발생한 신비한 일식(만약 그것이 일식이었다면)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망 당시 발생한 3시간 가량의 이상한 어두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필레곤의 기록
역사가 필레곤은 소아시아의 비두니아 지역 니케아라는 곳에서 엄청난 지진이 일어나 먼지와 흙과 나무 부스러기들이 공중에 솟아올라 그 검은 구름이 남쪽으로 흘러서 이탈리아, 희랍, 애굽의 하늘을 어둡게 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필레곤은 이 일이 희랍 달력 202번째 올림피아드 4년에 일어났다고 했으므로 AD 33년, 즉 예수님의 사망 시점과 일치하는 대목입니다. 그 해 어떤 날에 그 일이 있었다고 설명하지는 않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사망했을 때 하늘이 어두워졌다고 성경에 기록된 것과 일치하는 내용입니다.

이 외에는 없을까요?


역사가 개리 하버마스(Gary R. Habermas) 박사는 '역사적 예수(The Historical Jesus)'라는 책에서 예수의 생애에 관한 고대 자료는 45개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초기 교리적인 자료 19개, 4개의 고고학적 자료들, 17개의 비그리스도인의 자료들, 그리고 5개의 신약성경을 제외한 초기 그리스도인의 자료들을 일일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버마스는 비기독교인들이 기록한 17개의 자료를 면밀히 분석한 후 그 결과를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17개 자료 중 대다수는 예수의 생애에 대해 언급하고 있고, 12개 자료가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그 12개의 자료들 중에서 6개가 예수의 신성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또 하버마스는 예수의 생애에 대한 45개의 고대 자료 중에서 예수의 실제 생애, 인격, 가르침, 죽음, 부활 그리고 제자들의 초기 메시지 등을 철저히 분석하였습니다. 그 결과 예수와 관련된 고대 역사의 사건 기록들은 총 129가지나 된다고 밝혔습니다.

이처럼 고대 자료들을 꼼꼼히 분석한 하버마스는

예수님은 단순히 자신에 대한 역사적 자료들을 많이 가졌을 뿐만 아니라, 상당히 많은 분량의 질적인 자료들을 가진 역사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 분에 대한 자료는 고대에서 가장 공식적으로 언급된 것이며, 가장 입증된 삶을 보여주는 자료 중의 하나다

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또한 보스턴대학의 하워드 클라크 키(Howard Clark Kee)는 신약성경 외의 자료들을 연구한 후에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습니다.

예수에 관한 전통들이 이 정도로 다양하게 전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인류사에 그토록 심오한 영향을 계속 끼쳐온 이 인물의 생애, 가르침과 죽음에 대한 내용들이 명료하면서도 놀랄 만큼 일관되게 정돈되어 있다는 증거들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이처럼 예수님에 대한 기록은 성경에서만 언급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적인 이해관계가 없거나 오히려 반기독교적인 성향을 지닌 역사가들조차도 '예수님의 역사적 실존’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그들의 기록을 통해 확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실제 역사의 인물이었냐 아니냐는 '종교적 믿음’의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이는 '고고학적 사실’에 관련된 문제이며, 논란의 여지조차 없는 문제입니다.

11.2. 예수의 부활은 거짓일까?

예수님의 역사적 실존을 인정한다고 해도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이나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예수님은 사실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혹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사망하기는 했지만 결코 부활은 하지 않았다거나, 이 모든 사건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조작한 것이라는 '음모론’들을 내세웁니다.

물론, 죽은 사람의 부활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런 음모론을 제기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주장에는 근거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원인을 알 수 없는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아무런 근거도 없는 수많은 억측과 소문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인터넷에 무차별적으로 유포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들이 내세우는 논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죽은 사람은 살아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은 거짓일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기록은 제자들이 조작했던 것이고,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도 사실은 예수님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을 것이다.

’ 객관적인 '근거’가 있어서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내가 믿지 못하니까 잘못되었을 것이라고 주장을 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죠.

설령 지금까지 살펴본 성경의 강력한 역사적 신뢰성을 억지로 부정한다고 해도 이러한 주장은 객관적으로 밝혀진 역사적 정황 증거를 고려해 보면 터무니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살펴볼까요?

예수님의 일생을 다룬 사복음서에는 기독교에 불리한 내용도 여러 개가 나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친형제인 야고보는 예수님의 행적을 뻔히 지켜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신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고, 예수님의 제자였던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혀가는 것을 보고 자신은 예수님을 모른다고 3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심지어, 신약성경의 대부분을 저술한 사도 바울은 기독교를 지독하게 핍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예수님이 죽은 이후에 어떻게 변했을까요? 만일,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십자가에서 죽은 후 부활하지 않았다면 상식적으로 이들은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수많은 기적을 행하는 것을 자신이 똑똑히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의심과 믿음을 가진 제자들이라면, 예수님이 스스로 십자가에 돌려 돌아가신 후 3일 만에 부활할 것이라는 예언이 거짓이었음을 안 순간, '믿기 힘든 기적을 행하긴 했지만, 자기 말대로 죽음을 극복하지는 못한 희대의 사기꾼’에게 당했다고 생각하며, 배신감에 치를 떨며 그 조직은 와해되지 않았겠습니까?

11.3. 비기독교 문서에 기록된 예수의 제자들

그런데, 그 이후의 제자들의 행적을 살펴볼까요? 성경에서 살펴본다고 하면 행여 '인위적으로 기독교쪽에 유리한 문서’에서 찾아본다고 할까봐(물론 이런 주장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습니다) 다른 문서를 통해 확인해보겠습니다. 유세비우스가 쓴 '교회사’에는 예수님의 12 제자의 순교일지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로마에 가서 전도하다 박해를 견디다 못해 돌아오던 중 주님을 만나게 된다. 주님을 본 베드로는 “쿼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나는 네가 도망쳐 나온 네 대신 로마로 가노라. 주님의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다시 로마로 간다.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주님과 같은 모습을 할 수 없다. 거꾸로 못 박혀져서 순교했다.

안드레
헬라에 가서 전도하다가 아가야 성에서 십자가에 줄로 매달려 순교했다. 안드레의 달린 십자가는 X형이었다.

야고보
예루살렘에서 헤롯의 박해에 칼로 목이 베여져 순교했다.

요한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부탁하신대로 어머니(마리아)를 끝까지 모시고 있으며 유대 국내에서 전도하다가 예루살렘이 주후 70년 로마에게 멸망 된 후 에베소에서 전도했다. 그곳에서 온갖 박해와 고문 끝에 끓는 기름 가마에 집어넣었으나 기적적으로 튀어 나온다. 그를 박해하던 무리가 놀래서 그를 밧모섬으로 귀양 보낸다. 그곳에서 홀로 일생을 보내며 거기서 묵시를 받아 쓴 성경 이 바로 요한계시록이며 자기 수명대로 살다 자연사로 죽었다.

빌립
소아시아 부르기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기둥에 매달려 찢겨져 순교했다.

바돌로매
아르메니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잡혔다. 그는 수 없는 매질을 당한 다음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져 순교했다.

도마
인도에 가서 전도하던 중 현장에서 군인들이 던진 창에 맞아서 순교했다.

마태
이디오피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잡힌다. 잡혀 질질 끌려가면서 계속 전도를 했다. 결국 그들의 칼날에 목이 베여져 순교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곱
군중들은 시체나 다름없는 그를 성전 꼭대기로 데리고 가서 밀어 떨어뜨려져서 순교했다.

시몬
애굽으로 전도를 갔다 중 유대로 돌아와 그곳에서 전도하던 중 군인들이 쏜 화살에 의해 순교했다.

야곱의 동생 유다
파사에서 전도하던 중 활에 맞아서 순교했다.

맛디아
이디오피아에 가서 전도하다가 관중들이 수없이 던진 돌에 맞아 순교가면서 복음을 외쳤다.

11.4. 제자들의 순교가 반증하는 부활의 역사성

예수님의 12제자의 죽음은 성경이 아닌, 다른 문서에 이와 같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거짓이었다면, 수많은 기적을 직접 목도했음에도 믿지 않았던 믿음없는 제자를 포함한 12제자들이 모두 이처럼 한결같이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버려 순교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사망과 부활 직후 로마 치하에서는 로마 황제에 의해 조직적이고 잔혹한 기독교 핍박(화형, 십자가형, 사자의 먹이로 던져짐 등)이 이루어졌습니다.

AD 64년 부터 AD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하기까지, 네로, 도미티안, 트라얀, 하드리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셉티무스 세베루스, 막시미누스, 데키우서, 발레리안, 디오클레티안 갈레리우스 등 황제들이 기독교를 끊임없는 박해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오히려 더 퍼져나갔고 끔찍한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수많은 순교자가 끊이지 않았음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사실이 거짓이라면 어떻게 이런 집단적인 순교가 가능할 수 있을까요?

혹자는 이렇게 반문합니다.

종교적인 열심으로 '순교’를 불사하는 '광신도’들은 어느 종교에나 있는 것 아니냐?
어떻게 순교자가 많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것이 진실임을 입증할 수 있느냐?

충분히 일리있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이후에 불길처럼 번져간 기독교의 순교자들의 경우는 타 종교의 '순교’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 초대 교회 기독교 순교의 경우에는 검증되지 않은 '종교적 교리’에 속아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목격되고 확증된 부활이라는 사실’에 기초를 했다는 점입니다.

지금도 이슬람권이나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들 중에는 교리에 따라 자신의 목숨을 바치거나 전재산을 바치는 일이 허다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믿는 교리는, '자신이 분명히 직접 경험하거나 목도한 믿음에 의한 결과물이 아니라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믿음을 완전히 와해시켜버리리기에 충분한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바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는 것이 초기 기독교 순교에 관련된 문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다면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이들이 예수님의 죽음 이후 수백년이나 수천년 이후에 태어나서 단순히 '예수 사건’을 종교적인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예수님과 분명히 동시대에 살았으며, 그의 행적과 죽음을 직접 체험하고 목도한 세대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자신의 목숨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은 부활이라는 당시의 사건이 분명한 '경험적 사실’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이죠.

거짓말을 하거나 사기를 치는 사람은 존재하지만, 자신이 ‘직접 체험한’ 어떤 사실이 뻔히 거짓이거나 사기라는 것을 분명히 아는데도 그 믿음을 고수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극한의 고통까지 불사하며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는 일은 진실이 아니라면 불가능합니다. 여러분은 확실한 거짓에 대해 목숨을 걸 수 있습니까?

성경에는 예수님이 부활한 이후 12명 자신의 제자들 뿐만 아니라 당시 수많은 사람들(500여명)에게 나타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고린도 전서 15장).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가장 믿을만한 문서인 사복음서와 신약 성경에 분명한 '역사적인 사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을 뺀 분명한 다른 로마 시대의 기독교 박해사와 이후의 드러난 역사적 기록과 그에 대한 정황을 살펴도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11.5. 성경의 진실성을 부정하는 영지주의 문서

성경 자체의 신뢰성을 떠나, 성경의 사복음서(마태,마가,누가, 요한복음) 외에도 예수님의 행적과 그의 가르침을 상당히 다르게 기록한 고대 복음서들이 발견되었으므로 성경의 내용은 믿을 수 없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여기에 속하는 문서는 널리 알려진 바 있는 도마복음을 포함해, 베드로복음, 비밀마가복음, 유다복음, 마리아 복음 등인데 이 중 상당수는 2007년에 나그함마디 성서라는 선집으로 재출간된 바 있습니다. 이러한 문서들을 소위 '영지주의 문서’라고 부릅니다.

'영지주의’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어떤 영적인 세계에 대한 지식을 쌓음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상으로 성경과는 완전히 배치됩니다. 만일 영지주의 문서가 '문서학적’으로 성경보다 신뢰할 만한 객관적인 근거가 있다면, 우리는 과감히 성경을 버리고 영지주의 문서를 채택해야 할 것입니다.

11.6. 영지주의 문서의 진실성

그렇다면 과연 이 주장은 근거가 있는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러한 주장도 근거가 없습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번째 이유는, 기록 연대가 사복음서보다 후대이므로 설득력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영지주의 문서의 기록 시기는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사건이 일어난 AD 33년 이후 200여년 이상이 지난, AD 2세기 - 4세기 경에 기록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사복음서의 기록 연대인 AD 60 ~ 90년대보다 최소 100여년에서 300여년 이나 후대에 기록된 것입니다. 즉, 사복음서는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 예수님과 동시대 내지는 한 두세대 이후를 살았던 수많은 사람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구전되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 모든 복음서는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에 대해 매우 일관된 흐름과 통일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여러번 언급했지만, 예수라는 인물의 행적을 확실하게 목도하고 기억하는 세대들이 살아있는 시대에는 거짓으로 꾸며내거나 조작하기는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더욱이, 그것도 한 두개도 아닌 4가지 문서에서 조직적으로 조작하려는 시도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설령 조작이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았기에 거짓 정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을 것이고, 수정이 가해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렇지 않고 소수의 의도적인 무리들이 악착같이 조작했다면, 진실과 거짓이 뒤죽박죽으로 섞이게 되어 사복음서간의 내용에는 상당한 불일치와 모순점들이 발견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복음서는 문서간에 완전한 내용의 통일성과 일관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반면, 영지주의 문서들은 예수님의 행적을 목도한 세대가 다 죽고 난 이후 최소 2세대 이상이 지난 후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신뢰도가 매우 낮습니다.

영지주의 문서는 기억이나 전승에 의한 왜곡이 발생할 가능성도 높고, 조작되기도 쉬운 상황이기 때문에 사복음서보다 역사적 신뢰성이 ‘객관적인 기준에서’ 분명히 떨어지는 것입니다.

두번째 이유는, 영지주의 문서의 내용은 사복음서 내용과 배치되는 것을 떠나서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되고 납득이 안되는 내용들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사복음서를 믿지 말고 영지주의 문서를 믿어야 한다는 사람들의 주장은 사복음서의 내용에 믿기 힘든 기적들이 많이 나타나고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이 강조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속성은 영지주의 문서에서 훨씬 더 심하게 나타납니다. 무미건조하게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사복음서보다 영지주의 문서에서 예수님을 훨씬 더 신비롭게 묘사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이해할 수조차 없는 문구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도마복음에서는 성경과 달리

이 세상은 회복되고 구속받을 곳이 아니라 절망적이고 계속 타락하다 파괴될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으며, '보아라, 내가 그녀를 인도하여 남자가 되게 하리니, 그녀도 너희 남자들을 닮은 생령이 되리라. 자신을 남자로 만드는 모든 여자는 천국에 들어가리라

는 황당한 내용도 실려 있습니다.

베드로복음에서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군중에게 넘겨주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갑자기 대제사장이 묘지에서 밤을 지새는 황당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 다음 예수의 무덤을 막았던 돌이 굴러가고 머리가 길게 뻗어 구름까지 닿는 두 천사가 무덤 안으로 들어가 세 번째 사람을 도와서 밖으로 나오는데, 그 사람의 머리도 구름 위로 솟아올랐다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그들을 따라 무덤에서 나오는 것이 십자가인데, 이후 하늘에서 '잠자는 자에게 말씀을 전했느냐’라는 음성이 들려오는데, 예수가 아니라 십자가가 '예’라고 대답한다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내용도 있습니다.

세번째 이유는, 이러한 영지주의 문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제목에서 언급하고 있는 도마나, 베드로, 마리아, 유다와 같은 예수님의 제자나 직접 연관된 인물이 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지주의 이단 문서도 대부분 예수님의 사후 200여년 이상이 지나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영지주의 문서에서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실제로 이들 저자가 쓴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열두 제자나 어머니였던 사람들의 이름을 문서 제목으로 사용했습니다.

네번째 이유는, 심지어 어떤 영지주의 문서는 '완전히 위조되거나 날조’된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동성애를 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며 한 때 큰 이슈가 되었던 '비밀 마가복음’은 모턴 스미스가 1958년 유대 광야에 위치한 마르 사바 수도원에서 발견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1991년도에 스티브 칼슨에 의한 필적 감정에 의해 모턴 스미스가 자신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완전히 '위조’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은 하나님이라고 주장할 의도가 전혀 없으며 하나님의 영의 화신이라고 산헤드린 공회에 해명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지저스 페이퍼’라는 고대 문서의 발견과정은 너무나 허술해서 웃음이 나올 지경입니다.

발견자라고 주장하는 마이클 베이전트는 1961년 누군가를 만났는데, 그 사람은 예루살렘의 어느 집 아래를 파다가 아람어로 적힌 두 문서를 발견했고, 그것을 두 유명 고고학자에게 보여주어 그 기록 연대와 진정성을 확인받았다고 합니다. 두 고고학자는 두 문서의 기록시기를 대략 예수님의 사망시점으로 추정했다고 합니다.

베이전트는 그 사람의 금고에 들어가 그 파피루스 문서를 보았는데, 금고가 허리를 펼 수 없을 정도로 낮아서 사진은 찍을 수 없었다고 하며, 자신은 물론 그 수집가도 아람어는 읽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다만 그는 유명한 고고학자 이가엘 야딘과 나흐만 아비가드(이 둘은 고인입니다)가 파피루스 문서를 확인해주었으니 안심하라고 주장합니다.

여러분은 이 같은 증거를 통해 이 문서의 내용을 믿을 수 있습니까? 신빙성이 의심스러운 작가, 신원조차 확인이 안되는 고대 유물 거래상, 저자가 읽을줄도 모르고 원본이 확인되지도 않으며 검증조차 불가능한 문서, 그리고 죽어버린 고고학자들, 대체 이것을 무슨 근거로 믿을 수 있을까요?

11.7. 아류의 존재로 강화되는 성경의 사실성

매체에서 새로운 내용의 고대 문서가 발견되었다고 성경의 진실성이 부정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것에는 반드시 '객관적인 증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죠. 지금도 인터넷에서 어떤 객관적으로 입증된 사실이 밝혀져도 수많은 억측과 루머가 난무하는 것을 여러분들도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객관적인 기준에 근거해서 확인했을 때 터무니 없는 수많은 아류와 거짓이 끊임없이 난무한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성경이 오히려 더 확실한 역사적 진실임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명품이고 진품일수록 모조품이 많기 때문이죠. 아무런 가치도 없는 허접한 상품에는 모조품조차 붙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성경의 역사성을 의심하는 무수한 주장과 억측, 성경과 다른 새로운 문서가 발견되었다는 책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대부분의 책들은 몇 년 지나지 않아 허구임이 밝혀져서 끊임없이 사장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2,000여년이 넘도록 이토록 집요한 공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세계 1위의 베스트셀러 자리에서 내려오고 있지 않습니다. 이 모든 사실이 성경의 기록이 '역사적 사실’이며, '진실’임을 강력하게 반증하는 것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셀 수 없이 많은 성경의 고고학적 증거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2. 고고학적 증거

지금까지 성경은 한 인물에 대해 묘사한 고대 역사문서 중 그 어떤 문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확성과 신뢰도가 으뜸인 문서임을 확인했습니다. 또한, 성경의 핵심인 '예수님’과 관련된 기록도 결코 허구의 산물이 아닌, 역사적인 진실임을 다른 고대 문서와 역사를 통해 확인했습니다.

성경의 신뢰도를 확인하는 또 다른 방법은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인 사실을 고고학적인 발견이냐 유물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물론 고고학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믿음을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고고학이 성경의 역사적인 정확성을 입증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은 확실합니다. 만일 고고학적으로 분명히 밝혀진 사실이 성경에서 밝혀진 내용과 일치된다면 성경의 진실성은 더욱 확고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이야기들을 한낱 신화나 전설로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고고학적인 발견이 누적되고 지속되면서 판타지 소설 같은 성경의 수많은 인물과 도시, 유물, 사건들이 문자 그대로 사실임이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알려진 고고학적 발견만도 이미 넘쳐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대표적인 사례들을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12.1. 갈대아 우르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갈대아인이 살던 ‘우르’ 라는 지역이 있었다.” 성경에는 이런 내용이 기원전 1,400년 전, 즉 지금으로부터 3,400년 전에 기록된 창세기 11장 31절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발견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성경의 이 말씀을 한낱 전설과 같이 우습게 알고 수천년을 지나왔으며 최근까지만 해도 아무도 이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1800년대 후반, 현재 이라크 지역인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가 만나는 지점에서 많은 고고학적인 발굴이 이루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갈대아 우르지방이 실제로 있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위 지도에서 살펴보는 바와 같이, 유프라테스 강이 흐르고 있고, 티그리스 강이 그 위로 흐르고 있는 그 사이에 비옥한 땅이 유지되고, 지중해 까지 연결 됩니다. 메소(사이) 포타미아(강)는 강 사이의 땅이라는 뜻으로 시날 평지가 있는데 그 곳의 끝 부분이 우르지역입니다.

수많은 고고학자들에 의해 1,800년대 중반부터 지속적인 연구가 이루어진 결과 놀라운 사실들이 발견되었는데, 아주 정밀한 수로를 만들어서 그 지역의 농사를 위해 물관리를 철저히 했음이 발견되었고, 많은 점토판에 그려진 완벽한 지도들도 확인되었습니다.

12.2. 수메르 문명

세계사적으로 공인된 인류 최초의 문명이 수메르 문명이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수메르 문명은 갈대아 우르 지방에서 발달한 것인데, 수메르 문명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수메르 문자의 발견입니다.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문자는 수메르 사람들이 쓰던 쐐기문자(설형문자)입니다.

수메르인의 설형문자 점토판에서 발견된 놀라운 사실중의 하나는 대영박물관의 조지 스미스가 평생을 바쳐 연구하여 밝힌 '길가메시 서사시’에 관한 기록입니다. 수메르의 길가메시라는 족장이 기록한 서사시인데, 그 내용이 성경의 노아의 홍수 이야기와 내용이 거의 같습니다.

인류 최초의 문명의 기록에 노아의 홍수 사건 기록이 나온다는 것인데, 이는 인류 최초의 문명 이전에 분명 노아의 홍수 사건이 있었음을 반증합니다.

다시 말하면 수메르 문명이 홍수 이후에 생겨난 문명임을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수메르라는 말의 어원은 '세메르’에서 왔는데, '셈의 나라’라는 뜻입니다. 성경의 창세기에 기록된 노아의 아들중에서 장자권을 가진 자 '셈의 나라’라는 의미입니다.

12.3. 하란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란에서 살다가 사망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하란에 머물러 있는 아브라함에게 찾아와,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한 땅으로 가라” 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말씀에 순종해서(우르를 떠날때는 60세 가량) 그 하란에서 떠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75세 때에 가나안으로 출발합니다. 그래서 갈대아 우르도 중요하지만 이 하란이라는 지역도 대단히 중요한 지역 중의 하나인데 최근 하란 지역의 고고학적 발견이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하란 지역은 지금의 시리아땅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하란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발견에 의하면 과거에 매우 발달된 문명이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수메르보다 몇 백년 앞선 문명이라는 것이 이곳에서 나온 기록에 의해 증명되었습니다.

그 문명을 세웠던 나라 이름도 발견되었는데, ‘에블라’ 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지역을 '에블라 문명’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믿던 신의 이름도 발견되었는데, 그 이름은 '야’였습니다. 아마도 ‘야훼’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고고학적으로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된 기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2.4. 바벨탑과 지구라트

창세기 11장 1-9절에는 ‘온땅에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서로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시니 그들이 성쌓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하니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여기서 성이란 도시를 말합니다. 그냥 성이 아니라 거대한 도시였습니다. 이를 주도한 사람은 바로 고대 최초의 통일제국을 만든 사람 ‘니므롯’ 입니다. 니므롯이 통일제국을 만든 뒤 여러 가지 이질적인 종족들을 꼼짝 못하게 하고 쉽게 다스리기 위해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와 같이 도시부터 만든 이후에 높은 탑을 쌓은 것입니다.

바빌로니아의 신전을 지구라트라고 합니다. 그 신전중에 제일 큰 것으로 보이는 탑이 근래에 와서 발견되었습니다. 바빌로니아 시대의 기록에 의하면 이 지구라트가 그 당시에도 이미 오래된 역사를 가진 탑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빌로니아의 최고 왕이 느부갓네살이고, 예루살렘을 함락한 것이 기원전 586년입니다. 그 당시에도 이미 지구라트는 오래된 탑이었습니다. 바빌로니아의 기록뿐 아니라 그리스의 유명한 역사가 헤로도투스도 같은 기록을 남겨 놓았습니다.

BC500년 경의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바빌로니아의 거대한 건축물에 대해서 기록해 놓았는데, 이 건축물은 서로 맞물리는 여덟 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주위에는 꼭대기에 오르기 위한 나선형의 길이 나 있으며, 그 꼭대기에는 거대한 신전, 바빌로니아의 신의 집을 지어 놓았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 거대한 건축물은 210m 이상의 높이를 가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2.5. 헷(히타이트) 족속

창세기에는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 사라가 죽자 헤브론 지역의 막벨라에 있는 헷족속 에브론이 소유하고 있던 굴을 사서, 자기 아내를 묻은 후에는 자기도 묻히고 아들 이삭과 후손들이 쓸 무덤으로 사용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밭을 아브라함에게 팔았던 사람들이 바로 헷족속이라고 성경에 여러번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고고학적으로 이 히타이트 족속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은 지금부터 100여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 전까지 수천년동안 사람들은 히타이트 족속이라는 것은 하나의 전설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였고, 그 때문에 성경이 허무맹랑한 책이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히타이트 족속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들이 나타나고, 그들의 찬란했던 문명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헷족속이 고고학적으로 발굴됨에 따라서 히타이트 문명권이 규명되었는데, 위의 터키 지도 상에서 붉은 색으로 표시된 지역이 히타이트의 중심부 입니다. 히타이트의 수도는 '핫투사’인데 터키의 현재 수도인 앙카라에서 동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핫투사를 수도로 해서 터키를 중심으로 메소포타미아(비옥한 초생달) 전체를 지배하고 강력한 철기 문명을 바탕으로 해서 심지어는 이집트까지도 점령하여 대제국을 형성했음이 밝혀졌습니다.

12.6. 에돔 족속

창세기 36장 8, 11절, 기타 여러 곳에 보면 에돔족속이 있었고, 에돔 족속의 최초의 조상은 이삭의 아들인 에서이며, 에서는 에돔이라고도 불리었고, 세일 산이라는 곳에 거주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서나 에돔이라는 말은 모두 붉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에돔족속이라는 것도 성경에만 기록되어 있었고 다른 기타 어떤 역사적인 기록도 존재하지 않아, 수 천년간 성경이 허위라고 비난을 받아 왔습니다.

그런데 이것 역시 중동의 고고학적 발견이 붐을 일으킴에 따라서 세일산이라고 불리는 지역을 탐사하다가, 에돔족속이라는 집단이 그곳에서 수천 년간 거주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시는 요르단의 페트라 입니다. 페트라는 보시는 바와 같이 바위산을 파 들어가 만든 건축 구조를 하고 있습니다.

12.7. 여리고 성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의 인도로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들어온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땅에 있는 성중에 최초로 공격한 성이 여리고 성입니다.

여호수아 6장 15-17절을 보시면 “제 칠일 새벽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서 여전한 방식으로 성을 일곱 번 도니 일곱 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죠? 성 주변을 돌기만 했는데 무너졌다니요. 하지만, 과연 이것이 거짓이었을까요?

여러 고고학자들과 대영 박물관 탐사팀 등이 19세기부터 여리고성의 고고학적 발견을 시도한 결과 여리고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방법으로 정복되었다는 증거들을 찾아냈습니다. 대영박물관의 탐사팀에 의해 여리고성은 여호수아시대에 강도 6.0의 강력한 지진이 발생하여 파괴되었음을 보여주는 지질구조가 발굴되었습니다.

12.8. 다윗과 골리앗

사무엘상 17장 48-51절의 기록에 의하면 엘라계곡에서 이스라엘 민족과 블레셋 민족의 전쟁이 벌어졌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 중에 골리앗이라 불리는 거인 때문에 이스라엘 용사중 많은 사람들이 벌써 엎어져 죽은 상황에, 다윗이라는 소년이 자기 형들이 전쟁터에 나가 있어서 형들에게 음식을 갖다 주러 갔습니다. 다윗은 거기서 그 거인이 여호와 하나님을 저주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경멸하는 꼴을 보고 어린 다윗이 의분을 느껴 나가 싸웁니다.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때에 다윗이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취하여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 죽였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다윗이 달려가서 블레셋사람을 밟고 그의 칼을 그 집에서 빼어내어 그 칼로 그를 죽이고 그 머리를 베니” 어린 소년이 물매를 들고 나가서 한 방에 정통으로 맞추어 골리앗을 쓰러뜨린 것입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이 혼비백산 도망하고 이스라엘은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1993년 5월에 고고학자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고고학적 발견을 하다가 이마에 돌이 박혀있는 거인의 해골을 발견했습니다. 이마 좌우거리를 측정하여 거인의 키를 계산해 본 결과 그 키가 2미터 90센티나 되는 거대한 체격의 거인이었음이 밝혀졌고, 연대측정 결과 약 BC 1000년경의 다윗시대에 죽은 것으로 측정되었습니다.

발견장소가 팔레스타인 지역이고 체격이 거대하였고 이마에 돌이 박혀 있고 연대가 다윗 시대임을 종합해 볼 때, 이 해골의 주인은 다윗에게 죽임을 당한 골리앗의 유골임이 확실하다고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12.9. 앗시리아의 침공

강대국이었던 앗시리아는 주변 약소국가들을 침략하고 세력을 키우다가 기원전 722년에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게 됩니다.

그런데 앗시리아의 침공시 남유다는 힘이 약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약 136년을 더 견뎌내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어, 많은 고고학자들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비난하며 믿지 않았습니다. 당대 앗시리아가 얼마가 강력한 나라인데, 힘도 없는 히스기야 왕이 어떻게 이기겠냐며 믿지 않은 것이지요.

그런데 앗시리아의 수도 니네베에서 발굴된 실린더처럼 생긴 앗시리아의 비석에서 성경의 기록과 똑같은 내용이 발견되었습니다. 즉, 앗시리아왕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침공하러 갔다가 실패했다는 기록이 발견된 것입니다. 아래그림이 산헤립의 원통형 비문입니다.

또한, 성경 열왕기하 20장 20절에 보면 산헤립의 침공 때 히스기야왕이 땅을 파고 수로를 만들어서 물을 성안으로 끌어들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수로는 그대로 발굴되어 오늘날에는 이곳이 예루살렘의 관광명소가 되었습니다.

12.10. 성경의 고고학적 사실성

이 외에도 성경의 기록을 입증하는 고고학적인 발견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도 없이 많이 누적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의 모든 내용이 고고학적으로 다 밝혀진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고고학적인 확증은 그에 해당하는 역사적 유물이 발견되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발견된 고고학적인 발견 중 성경의 기록과 위배되는 것은 단 한건도 없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터무니 없기 때문에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 주장들도 결국은 고고학적인 발견에 침묵하게 되었습니다.

기타 종교와 달리 유독 성경만이 ‘역사적’,'고고학적’인 검증과 공격을 집요하게 받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성경은 시대적, 지리적,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전혀 거론하지 않고 특정한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지어낸 소설이나 신화가 아닌, 구체적인 인물, 지명, 국가, 시대를 아주 자세하게 언급한 '역사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기타 종교 서적이나 신화들에 대한 반박이 별로 없고, 유독 성경만 이러한 집요한 포화를 집중적으로 받기 때문에 성경 자체에 문제가 많다고 혹시 여러분이 생각하셨다면 그것은 크나큰 착각입니다.

다른 종교 경전이나 신화는 기록 자체부터 성경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역사적 신뢰성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나 지명, 인물 자체를 다루지 않기 때문에 검증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검증할 기본 자격조차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비판 자체가 의미가 없는 것이지, 그 자체의 역사성이나 진실성에 문제가 없어서가 결코 아닙니다. 이는 진품 명품일수록 모조품이 많고 소비자들의 기대치가 높으며, 비판이 많은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이 모든 사실은 성경이 역사적 진실을 그대로 담고 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고고학에 의하면 구약전승의 대부분이 역사적 사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8세기와 19세기의 중요한 역사학자들은 성경에 대한 과다한 의심을 품고 있었다. 그 의심들은 지금도 종종 제기되고 있는데, 그러한 의심들이 점차 근거가 없는 것들임이 밝혀지고 있다. 고고학적 발견들이 거듭되면 될수록 성경의 내용을 더욱 뒷받침하고 있어서 역사적 사실로서의 성경은 점점 더 확실해지고 있다. (메소포타미아 고고학의 권위자 Albright 박사)

성경의 기록을 부인한 고고학적 발견은 전혀 없었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수많은 고고학적 발견물들이 성경의 역사적 진술들을 개괄적으로, 혹은 세세하게 확증하고 있음은 명백하다. (팔레스타인 고고학 전문가 Nelson Glueck 박사)

다음 글에서는 아주 흥미로운 주제를 다루려 합니다. 성경에서 성취되었고, 지금도 성취되고 있는 예언에 관한 내용입니다.

13. 성경의 역사적 신뢰성

지금까지 성경이 과연 역사적으로 믿을만한 문서인지, '신학적 기준’이 아닌, ‘문서학적’,‘역사적’,'고고학적,‘정황적’ 증거를 통해 객관적으로 믿을만한 근거가 분명함을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중에는 이렇게 끊임없이 의심을 제기하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신뢰할만한 역사적인 문서라고 가정하자. 그런데 대체 그게 어쨌다는 거냐? 그냥 사람이 역사적인 기록을 정확하게 남긴 것에 불과하지 않느냐?
성경이 '하나님’이라는 '신’에 의한 계시로 기록되었다는 '성경의 주장’은 무슨 근거가 있느냐?

이는 앞서 살펴본 증거들 만으로도 충분히 반박이 가능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기적들과 사건들, 예수님의 실존과 죽음, 부활 등의 초자연적인 일들이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는데, 이러한 초자연적인 일들은 '신적인 존재’의 개입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그래도 의심하시는 분을 위해 추가적인 증거를 제시하려고 합니다. 그 증거는 바로, 성경 내용 자체의 '내적 일관성과 예언 성취’입니다.

성경은 지금처럼 교통이 발달하지도 않았고, 인터넷이나 방송, 책 등과 같은 정보 매체는 커녕 인쇄술의 혜택조차 받지 못하던 수천년 전에 쓰여진 고대 문서입니다. 그것도 지리적, 시기적으로 완전히 동떨어졌고, 정보의 교류조차 전혀 불가능하던 시기에 40여명의 독립적인 저자들이 저술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경 문서 간의 내용에 상호 일관성이나 완전한 통일성, 그리고 역사적인 예언의 성취가 발견된다면, 이는 신의 개입이 없이 상식적으로는 결코 발생할 수 없는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3.1. 성경의 예언 성취

그렇다면, 성경 자체의 내적 일관성과 신뢰성은 어떻게 검증할 수 있을까요? 가장 간단하고 확실한 방법은 성경에 무수히 많이 나오는 예언이 문자적으로,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성취되었고 서로 다른 성경 문서간의 예언에 불일치가 없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27%( 구약 6,641 / 23,210 구절, 신약 1,711 / 7,914 구절)는 예언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역사’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객관적인 평가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언가라고 하면, 유명한 노스트라다무스나 진 딕슨, 에드가 케이시 혹은 동네 점집 무당을 생각할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실 여러분이 막연한 판타지 소설이라고 생각하는 성경의 1/3이 아주 구체적인 인류에 대한 역사 예언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또한, 어떤 상황에도 끼워맞춰서 먹힐 수 있는 애매모호한 예언이 아닌, 여러 민족과 국가의 역사에 대한 커다란 세계사적 흐름을 심지어 연대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맞춘 예언이 성경에 넘쳐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심지어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와 미래의 일까지도 예언하고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지금부터 그 내용에 대해서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13.2. 성경의 기록 연대 추정법

성경의 예언은 사건이 발생한 후대에 조작된 것이라는 음모론을 제기하실 분이 분명히 계실 것 같아 성경의 기록 연대 추정에 대해 우선 언급하겠습니다.

여러분이 믿지 못한다고 해서 공식적으로 입증된 성경의 기록 연대가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고문서의 경우 원본인 경우 과학적 연대 측정법을 이용하여 측정 연대를 알 수 있으나, 성경과 같은 사본인 경우 다각적인 방법을 통해 기록연대를 추정합니다.

연대 측정의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문서의 문체나 언어를 고고학적으로 연구하여 연대가 입증된 유사한 내용이나 문체의 고문서와 비교 조사하거나, 기록된 지명이나, 인명, 고유명사를 단서로 하여 추적하기도 합니다.

또한 문서의 기록자가 신분과 함께 기록연대를 표기해 두는 경우도 있어 참고하는 경우도 있고, 신빙성 있는 다른 문서에서 그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경우 참고하여 연대를 추정하기도 합니다.

성경의 연대 측정은 성경 전 66권에 대하여 정밀하게 입증이 되었고, 성경의 기록 연대는 학자마다 거의 일치하여 추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1+1이 3이라고, 1+1=3 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처럼, 설령 여러분이 성경의 예언이 믿기지 않아, 성경이 후대에 조작되었다고 주장한다고 공식적으로 밝혀진 성경의 기록 연대가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의 연대 추정은 이미 학계에서 확증된 것입니다.

13.3. 성취된 예언들

우선 역사적으로 분명하게 성취된 예언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들

성경 곳곳에 기록된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은 이스라엘과 유대의 고대사를 통해 일차적으로 성취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라가 망하고 2000여년 동안 전세계를 돌며 유랑생활을 하다가 1948년 극적으로 독립하여 국가를 수립한 현재의 이스라엘의 상황에서도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다른 이방 나라들과 관계된 예언들

1. 에돔
야곱의 형제인 에서가 에돔의 설립자이인데(창세기 36장) ,에돔은 에서의 사후에, 야곱에 의하여 세워진 이스라엘을 돕지 않았고 (민수기 20장)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기 좋아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에돔의 멸망을 선포하셨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예언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모든 예언은 에돔의 수도 페트라가 보기 어려울 정도로 강하게 요새화 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AD 636년에 페트라는 모하메드에 의하여 함락되었고, BC 586년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당함으로써 페트라와 에돔은 역사의 페이지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예언이 기록된 창세기, 민수기, 예레미야, 에스겔, 오바댜, 말라기의 기록연대는 각각 BC 1446-1406년(창세기, 민수기), BC 627년(예레미야), BC 565년(에스겔), BC 855-840년(오바댜), BC 435-425년(말라기)입니다.

2. 바벨론
바벨론은 다니엘(기록연대 BC 530년경) 2:31-43과 7:1-8에 언급하고 있는 세계 최초의 4대 강국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사야(기록연대 BC 740-681년) (13:17-19)와 에레미야(기록연대 BC 627년)(51:11)와 마찬가지로 다니엘은 강대국 바벨론이 멸망할 것을 예언한 바 있습니다.

이 예언은 BC 539년 10월 13일 즉 메대 사람 다리오가 원래 성벽 밑으로 흐르던 유프라테스 강 줄기를 역류시켜 성이 함락됨으로(다니엘 5장)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3. 메대- 바사 (페르시아)
BC 551년에 강변에서 기록한 다니엘 8:1-7, 20-21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다니엘은 환상 중에서 그 후 약 217년 동안에는 발생하지도 않을 일련의 전쟁에 관한 말씀을 듣게 되는데, 다리오 3세(여기서 수양으로 묘사)가 (수염소로 상징된) 헬라의 알렉산더 대제에게 멸망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은 BC 334년에 그레니쿠스 전쟁과 BC 333년에 잇수스 전쟁 및 BC 331년에 고가멜라 전쟁 등 3대 결정적인 전쟁에서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4. 헬라(그리스)
다니엘은 또한 알렉산더가 죽고 헬라제국이 네 개의 작고 분리된 나라로 분리될 것과 장군 중의 한 사람이 그 나라를 다스릴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다니엘 7:6,8:8,20-21).

이것은 알렉산더가 33세에 바벨론에서 열병으로 죽은 후 BC 301년에 정확하게 발생하였습니다.

5. 로마
다니엘은 로마가 넷째 왕국이며 세기가 철과 같다고 예언하였는데(다니엘 2:40-41), 이는 역사적으로 입증되었습니다. BC 300년까지도 로마는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세력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BC 200년까지 로마는 가장 강적으로 보았던 카르타고를 정복하였으며, BC 63년에는 로마의 장군 폼페이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였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그 예언 가운데서 "왕국이 나누일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AD 364년에 성취되었습니다.

6. 애굽 (이집트)
예수님이 오시기 600여 년 전에 이미 선지자 에스겔은 이집트가 지극이 미약한 나라가 되어 다시는 나라들 위에 스스로 높이지 못한다고 예언했습니다.(에스겔 29:1-2,15) 애굽은 BC 3,200년경 하나의 왕국으로 통일되어 있었고 BC 332년에 애굽을 정복한 알렉산더 대제의 때까지 왕조를 계승하며 통치하였습니다.

하지만, 주목할 것은 에스겔이 애굽을 에돔의 경우처럼 사라질 것으로 예언하지 않고(35:3-7) 다만 애굽이 붕괴, 즉 세력을 잃게 되어 다시는 세계 강국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이 예언은 현재 문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7 로스 (러시아)
에스겔 38-39장에서는 인류의 종말이 가까울 때, 러시아와 아랍의 거대한 연합군이 홀로 있는 이스라엘을 공격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직 성취되지는 않았지만, 2022년 현재 중동과 러시아의 국제 정세가 급박하게 에스겔의 예언과 유사한 흐름으로 전개되고 있습니다.(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후에 언급할 것입니다)

특수 도성들에 관한 예언들

1. 두로
에스겔이 에스겔 26장에 두로 성에 대하여 언급한 예언은 성경 전체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예언 중 하나입니다. 두로는 두 도성으로 되어 있어 하나는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약 96km 떨어진 해변에 가깝고, 다른 하나는 지중해에서 조금 떨어진 성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에스겔은 다음과 같이 예언했습니다.

이 모든 예언은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에스겔은 이 예언을 BC 590년경에 기록하였는데, 그로부터 4년후인 BC 586년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은 두로 성을 포위하였고, 13년 후 BC 573년에 이 해변 도시는 멸망하였습니다.

하지만 섬에 있는 도성은 함락시키지 못했고, 그 후 241년 동안 두로의 섬 도성은 안전하였기 때문에, 그 성읍이 완전히 파멸될 것이라는 에스겔의 예언은 빗나간 것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BC 332년에 알렉산더 대제가 이 현장에 등장하여 결국 섬 도시는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알렉산더는 옛성의 무너진 것들을 이용하여 해변에서 섬까지 잇닿는 다리를 건설하기까지 했고, 이러한 과정 과정에서 알렉산더는 해변을 문자 그대로 말끔히 쓸어 버렸습니다.

미국의 고고학자 에드워드 로빈슨은 고대 두로의 해안 부근에 연결된 바다 밑에서 40-50여 개의 대리석 기둥들을 발견한 바 있습니다.

7개월 간의 포위한 후 알렉산더는 섬 도성을 장악하여 파멸시켜 버렸고, 이후 그 해안지역은 마을 어부들이 그물을 널려 말리는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두로는 하루에 10,000 갤런 정도의 신선한 물을 내뿜는 샘으로 알려진 로즈레인(Roselain)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결코 재건되지 않았습니다.

2. 여리고
여호수아(기록연대 BC 1450년 경) 6장을 보면 여리고 성의 함락과 그에 따른 도성의 파멸에 관한 기록이 있고, 이 사건 직후 여호수아는 이 무너진 성읍에 관한 세 가지의 예언을 한 바 있습니다.

이로부터 약 5세기 후인 BC 930년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재건하였는데, 그가 터를 쌓을 때에 그의 맏아들 아비람이 죽었고, 그가 문을 완공하였을 때 막내 아들 스굽이 죽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열왕기상 16:34).

3) 니느웨 (나훔 1-3장)

요나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요나라는 히브리 선지자로 하여금 니느웨가 회개하도록 전하게 하심으로써 그 사악한 도성을 파멸에서 구하셨지만, 그 성읍 사람들은 곧 다시 악행을 일삼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BC 650 년경에 나훔이라는 다른 선지자는 니느웨가 끝내 완전히 파멸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이 예언을 할 즈음에 니느웨는 전혀 함락되지 않을 것으로 보였습니다. 성벽의 높이가 30m나 되고 그 폭이 넓어서 그 위로 병거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였으며 성의 둘레는 96km나 되고 1,200개 이상의 견고한 망대들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나훔의 예언이 있은지 불과 40년도 못 되어 니느웨는 멸망하였습니다. 메대와 바벨론의 연합군이 성을 약 2개월간 포위한 후, BC 612년 8월에 성벽을 뚫고 쳐들어왔기 때문입니다.

함락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성내 반역자들이 있어 성의 상수도 공급을 밖으로 유출시켰기 때문이었습니다. 파멸 현장이 너무나도 극심해서 알렉산더 대제는 한때 강력한 건축물이 서 있던 그곳에 군대를 끌고 행진해 들어갔을 때, 거기에 성이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4) 예루살렘 (마태복음 24:1-2; 누가복음 19:41-44, 21:20-24)

여기에 인용된 말씀은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으로, 예루살렘이 파멸되고 시민들은 학살당하며, 성전이 완전히 무너져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이후 40년도 채 안 되어 이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AD 70년 2월, 로마장군 티투스(Titus)는 80,000 병력과 함께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약 5년 전 시작된 반항 세력을 진멸하고자 하였고, 그 해 4월에 티투스는 포위 작전을 강화하였습니다.

성 안에 고립된 사람들의 절망에 빠져 여자들은 자기 아들들을 잡아 먹는 일까지 발생하였고, 남자들은 새 똥을 서로 먼저 먹으려고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일이 벌어질 정도였습니다.

결국 그 해 9월에 성은 정복되고 학살이 시작되어 약 50만 명의 유대인들이 학살 당했습니다 결국 성전은 초토화되었고 성전터는 파헤쳐졌으며 모든 것이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특정 인물에 관한 예언들

1. 요시야

열왕기상에 보면 이스라엘의 악한 왕 여로보암과 관련된 내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이르니 마침 여로보암이 단 곁에 서서 분향하는지라 하나님의 사람이 외쳐 가로되 단아 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저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 제사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 사르리라 하고 (열왕기상 13:1-2)

이 일은 BC 975년에 있었던 일인데, 이후 약 350년이 지난 BC 624년에 이스라엘의 새 왕인 요시야가 행한 다음과 같은 조처를 볼 수 있어, 예언이 그대로 성취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로 범죄케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벧엘에 세운 단과 산당을 왕이 헐고 또 그 산당을 불사르고 빻아서 가루를 만들며 또 아세라 목상을 불살랐더라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산에 있는 묘실들을 보고 보내어 그 묘실에서 해골을 취하여다가 단 위에 불살라 그 단을 더럽게 하니라 이 일을 하나님의 사람이 전하였더니 그 전한 여호와의 말씀대로 되었더라 (열왕기하 23:15-16)

2. 고레스
선지자 이사야는 바사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습니다.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 (이사야 44:28)

이사야가 이를 기록한 시기는 BC 712년경입니다. BC 606년에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많은 유대인들을 그의 성읍으로 잡아갔고(시편 137편) 70년간 이들은 외국에서 지내게 됩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예레미야가 예언한 것이었습니다(예레미야 25:12, 29:10). 그러던 중 BC 536년에 기적이 일어났다. 선지자 에스라는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에스라 1:1-2).

이사야는 고레스왕이 유대인들의 귀향을 허락할 것과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할 것을 그 일이 일어나기 176년 전에 이미 예언한 것입니다.

3) 알렉산더 대제
다니엘이 그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다니엘 8:3-8에 언급된 수염소가 곧 알렉산더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알렉산더는 세계를 정복한 최초의 인물로, 그는 BC 334년 봄에 헬레스폰트를 건넜고, BC 333년에는 잇수스 전쟁에서 페르시아 군대와 접전하여 완승을 거두었습니다.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알렉산더가 예루살렘에 당도했을 때 문에서 대제사장을 만났는데 그는 알렉산더의 대 페르시아 승전이 이미 220년 전인 553년에 다니엘에 의하여 예언된 것이었다고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깊은 감동을 받은 알렉산더는 대제사장에게 경배를 하고 예루살렘을 공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4)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
알렉산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안티오쿠스는 이름이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다니엘 8:9-14에 확실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안티오쿠스는 BC 167년에 팔레스타인을 정복한 시리아의 장군으로서 유대인을 증오하던 피에 굶주린 사람이었는데, 그는 성전 안의 지성소까지 들어가 제단 위에서 돼지를 잡아 바침으로써 성전을 더럽히기까지 했습니다. 다니엘은 이미 약 386년 전에 이것을 예언한 바 있습니다.

5) 예수님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예수님에 대한 크고 작은 예언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 최소 400년 이상 이전에 기록된 것인데, 이는 역사 속에서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이 외에도 성경에는 수많은 크고 작은 예언들이 성취되었음을 입증하는 구절이 무수히 많습니다. 고고학적으로 검증된 성경의 기록연대가 역사 속에서 실제로 성취된 예언보다 훨씬 이전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성경의 예언이 분명히 이루어졌음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13.4. 부정할 수 없는 증거들

여러분은 혹시 ,'아니야, 예언에 관련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후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조작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런 의혹은 얼마든지 제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뒷받침하는 '객관적인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예언이 기록된 시기는 실제로 그것이 성취된 사건이 발생한 시점보다 앞서 있음이 역사적, 고고학적으로 분명히 밝혀져 있습니다. 이를 반박할 객관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은 분명히 근거없는 억지 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유명한 노스트라다부스나 진 딕슨 같은 예언자들의 예언도 틀린 경우도 상당히 많을 뿐 아니라, 예언에 대한 해석 자체도 애매모호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나쁜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조심하고, 처신을 잘하면 악재를 피해갈 수 있다는 식의 두리뭉실하고 조건적이며, 뜬 구름잡는 식의 무당 예언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예언은 조건적이지 않습니다. 애매호호하지 않습니다. 두리뭉실하지 않습니다. 분명하고 직설적이고 단호합니다. 1분 1초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인간이 특정한 개인의 사적인 운명도 아닌, 국가와 민족,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정확하게 예언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결코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성경은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입증하는 근거입니다.

여기까지 객관적인 증거를 살펴보았음에도, 아무 근거도 없이 다음과 같은 억지 주장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고고학적으로 맞다고 하지만, 내가 직접 경험하지 못했으니 성경은 후대에 조작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분들은 정말로 성경을 믿는 것이 불가능할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의 역사적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쓰여지던 시대에 살지 못했고, 그렇게 기록되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하지 못했기 때문에, 분명한 역사적 근거가 있음에도 무시한다면, 남아 있는 방법은 한가지입니다.

여러분과 지금 제가 살고 있는 현세대에 성취되었고, 성취되고 있으며, 성취될 예언을 알아보면 되겠죠? 만일 이것까지 보여드렸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못하겠다는 분은, 건전한 회의론자가 아닌 비합리적인 회의주의 신봉자일 것입니다.

이런 분들은 수백가지가 아니라 수만가지 증거를 들어도 믿지 않겠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기 때문에 결코 설득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만을 보려는 고집쟁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최근 성취되었거나 진행 중인 예언,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성경의 예언을 살펴보겠습니다.

14. 성경의 예언들

지금부터는 여러분과 제가 살고 있는 현 세대에 성취되었거나 현재 진행 중인 예언,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사건에 대한 성경의 예언을 살펴보겠습니다.

현 세대에 가장 확실하게 성취된 예언은 바로 ‘이스라엘’ 이라는 국가의 회복입니다. 먼저 이스라엘의 역사를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수난의 역사였습니다. 모세라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에 의해 이집트의 노예 생활을 마친 유대인은, BC 1020년 여호수아라는 리더를 앞세워 하나님이 약속한 땅 가나안에 입성합니다. 이후 사울왕이 왕국을 이루고 다윗왕이 왕국을 통일했으며, 솔로몬에 이르러 영화를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BC 932년경 솔로몬왕이 사망한 후,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되었고, 이스라엘은 아시리아에, 남유다는 신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당했습니다. BC 63년 경, 로마(폼페이우스)에 의해 점령되었고, AD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됩니다. 이후, 유대 민족은 뿔뿔이 흩어져 전세계를 유랑하는 수난의 세월을 겪게 됩니다.

이후 2,000여년 가까이 전세계를 떠돌며 2차 대전의 대학살과 같은 비참한 현실을 겪던 유대인은 19세기말부터 시작된  시온주의 (팔레스타인으로의 회귀) 운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후, 1917년 영국의 밸푸어 선언으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의 건설 보장이 약속되어, UN의 승인하에 1948년 기적적으로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건국됩니다.

이후 영토 분쟁을 빌미로 주변의 7개 아랍국가와 제 1차 중동전쟁이 벌어지게 되는데, 여기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80%를 차지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팔레스타인 300만명이 난민으로 전락하여 현재까지 이스라엘과 끊임없는 민족적 마찰을 빚고 있습니다.

한 국가가 완전히 망하여 민족이 전세계로 뿔뿔이 흩어져 2,000여년을 유랑생활을 하던 민족이 다시 고토로 돌아와 나라를 건국한 예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이스라엘’이 유일합니다.

완전히 망한 나라, 뿔뿔이 흩어진 민족, 600만이라는 엄청난 대학살을 겪은 유랑 민족이 어떻게 아무 힘도 없이 고토로 돌아와 나라를 건국할 수 있겠습니까? 이게 단순한 우연일까요?

14.1. 이스라엘의 건국

성경에는 이스라엘의 멸망과 재건, 그리고 이후의 과정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예언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로마에 멸망당하기 전 예수님은 예수님은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에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지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니라.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라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누가복음 21:20-24)

이 예언은 AD 70년에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로마 장군 티투스(Titus)는 잔인하게 반란을 진압하고 수많은 유대인들을 처형하였고 수많은 유대인들을 다른 나라에 노예로 팔고, 예루살렘을 완전히 파괴하였으며 성전을 불살랐습니다.

약 1천여 명의 유대 군인들과 여자들과 어린이들이 마사다의 광야 요새에서 여러 달 동안 로마 군대에 대항하여 버텼습니다. 하지만, 결국 AD 100년에 무너지고, 이스라엘은 문자 그대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후 이스라엘 민족은 여러나라에 흩어졌고, 이스라엘 본토는 폐허가 되었으며,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누가복음에 기록된 그대로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후 온 땅에 흩어질 것과, 훗날 고향 땅으로 돌아와 나라를 건국할 것이라는 예언은지금으로부터 최소 2500년 전에 기록된 성경 곳곳에 ‘너무나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이 땅에서 쫓아내어 너희와 너희 열조의 알지 못하던 땅에 이르게 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주야로 다른 신들을 섬기리니 이는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지 아니함이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러나 보라 날이 이르리니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북방 땅과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 열조에게 준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리라. (예레미아 16:13~15) (기록 연대 BC 627 - 580)

여호와께서 너희를 여러 민족 중에 흩으실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쫓아 보내실 그 여러 민족 중에 너희의 남은 수가 많지 못할 것이며 너희는 거기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바 보지도 못하며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며 냄새도 맡지 못하는 목석의 신들을 섬기리라.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 이 모든 일이 네게 임하여 환난을 당하 다가 끝날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그의 말씀을 청종하리니 (신명기 4:27~30) (기록연대 BC 1410 - 1395)

전에는 내가 그들이 사로잡혀 여러 나라에 이르게 하였거니와 후에는 내가 그들을 모아 고국 땅으로 돌아오게 하고 그 한 사람도 이방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내가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인 줄을 알리라.(에스겔 39:28) (기록연대 BC 593 - 571)

14.2. 이스라엘의 회복

불과 반 세기 전에 일어난 사건이 2,500 여년전에 기록된 성경에 한 군데도 아닌 여러 군데에서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뿐만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이 건국된 이후 어떻게 회복될지에 대한 예언도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 당한 이후, 팔레스타인 땅은 이 예언대로 황폐한 곳이었습니다. 마크 트웨인이 1870년대에 팔레스타인을 방문한 후 그 곳에 대해 언급한 바는 '무서운 황폐’라는 말이었습니다. 그 어디에서도 초목을 볼 수 없었으며, 침식, 악화되는 지역, 말라리아의 습지대 뿐이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20세기가 되기 전까지 그 땅에 사는 사람은 소수의 유랑하는 유목민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이렇게 황폐한 땅이 옥토가 될 것으로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이 황무지가 옥토로 변할 것이라고 2500여년 전 에스겔서를 통해 예언한 바 있고, 너무나 황당하게만 생각되었던 이 예언은 현재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너희 이스라엘 산들아 너희는 가지를 내고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과실을 맺으리니 그들의 올 때가 가까이 이르렀음이니라  내가 돌이켜 너희와 함께 하리니 사람이 너희를 갈고 심을 것이며 내가 또 사람을 너희 위에 많게 하리니 이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로 성읍들에 거하게 하며 빈 땅에 건축하게 하리라 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으로 많게 하되 생육이 중다하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접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전에는 지나가는 자의 눈에 황무하게 보이던 그 황무한 땅이 장차 기경이 될지라 사람이 이르기를 이 땅이 황무하더니 이제는 에덴 동산같이 되었고 황량하고 적막하고 무너진 성읍들에 성벽과 거민이 있다 하리니 (에스겔 36:8,9,10,11,34,35)

이스라엘의 움이 돋고 꽃이 필 것이라. 그들이 그 결실로 지면에 채우리로다 (이사야 27:6)

이스라엘이 건국된 이후에 대규모의 조림사업이 이루어져 나무가 국토를 덮었습니다. 습지대에서는 물을 빼내었으며 모래 언덕은 초목으로 단단해졌고 토질은 개량되었으며 방대한 관개 사업이 추진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건국된 1948년부터 1970년까지 강수량이 550%가 증가했고, 황무지가 드넓은 초원으로 바뀌었습니다. 농업은 현대화되었고, 옥수수, 밀, 목화, 땅콩, 사탕 무, 그리고 견과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이스라엘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전체 식량의 70%이상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현재 이스라엘은 세계 제2의 포도산물 생산국이고, 이스라엘의 오렌지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포도, 바나나, 대추 야자, 레몬, 그리고 그 밖의 다른 과일들이 막대한 양의 채소와 아울러 재배되고 수출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불과 반 세기전의 예언입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시는 여러분과 제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이루어진 예언입니다. 앞서 살펴본 고대 예언을 아무리 막무가내로 조작이라고 부인하신다고 해도 불과 반세기 전에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고, 이에 대한 문서도 넘쳐나는 상황에서 이 예언까지도 조작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성경의 내용은 일점 일획도 변하지 않은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억지로 부인을 하려고 악을 써서 노력을 해도 도무지 부인을 할 수 없을 정도록 명확하게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14.3. 현재의 예언

여러분이 그래도 고집을 버리지 못하고 아직도 악착같이 부인하신다면, 2022년 현재 진행 중인 성경의 예언을 살펴보겠습니다. 너무나도 유명한 에스겔 38,39장의 곡과 마곡의 전쟁과 관련된 예언입니다. 우선 이 예언을 개략적으로 확인해보고 성경 구절과 현재의 상황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에스겔, 스가랴, 시편 등에는 '마지막 때’가 이르면, 이스라엘이 고토로 이동하여 나라를 재건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고 이는 1948년 5월 14일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이후, 이스라엘은 역사상 유례없이 평안하게 거하는 시기가 찾아오게 되는데 그 시기가 현재입니다.

이 때가 되면 이스라엘이 전 세계의 관심과 골칫거리로 전락하게 될 거라는 에언이 스가랴서에 나와 있는데, 이 무렵 이스라엘 주변의 수많은 아랍 나라(이슬람 세력)들이 동맹을 맺어 홀로 고립된 이스라엘을 진멸하기 위해 공격하게 됩니다. 이 때 러시아도 이 전쟁에 ‘맹주’ 역할을 자처하며 이스라엘을 치게 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때 이 연합국 중에서 가장 중요한 나라를 러시아와 이란으로 지목하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이스라엘이라는 조그만 나라가 혼자서 세계 2위의 군사 강국인 러시아 하나와 전쟁하는 것도 승산이 없는데, 러시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주변의 수많은 아랍 동맹국들까지 가세한다면 아무리 이스라엘이 목숨 걸고 싸운다고 할지라도 그 결과는 너무나 뻔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완전히 반대가 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완전한 도움으로, 이스라엘 혼자 러시아를 비롯한 모든 연합군을 완전히 진멸하여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고, 이 연합군의 무기를 무려 7년간 불태울 것이라고 상세하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전쟁에서 패배한 연합군의 시체를 '하몬곡의 골짜기’라는 곳에 매장할 것이고 그 기간이 7개월이 걸릴 것이며, 여기에 쌓인 시체를 수많은 동물들이 와서 뜯어먹을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본격적으로 에스겔 38,39장의 예언을 살펴보겠습니다.

  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2.인자야 너는 마곡 땅에 있는 곡 곧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에게로 얼굴을 향하고 그를 쳐서 예언하여 3.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 곡아 내가 너를 대적하여 4.너를 돌이켜 갈고리로 네 아가리를 꿰고 너와 말과 기병 곧 네 온 군대를 끌어내되 완전한 갑옷을 입고 큰 방패와 작은 방패를 가지며 칼을 잡은 큰 무리와 5.그들과 함께한 바 방패와 투구를갖춘 바사와 구스와 붓과 6.고멜과 그 모든 떼와 극한 북방의 도갈마 족속과 그 모든 떼 곧 많은 백성의 무리를 너와 함께 끌어내리라.7.너는 스스로 예비하되 너와 네게 모인 무리들이 다 스스로 예비하고 너는 그들의 대장이 될찌어다 8.여러 날 후 곧 말년에 네가 명령을 받고 그 땅 곧 오래 황무하였던 이스라엘 산에 이르리니 그 땅 백성은 칼을 벗어나서 열국에서부터 모여 들어오며 이방에서부터 나와서 다 평안히 거하는 중이라 9.네가 올라오되 너와 네 모든 떼와 너와 함께한 많은 백성이 광풍같이 이르고 구름같이 땅을 덮으리라

마곡과 로스는 역사적, 지리적으로 현재의 러시아 지방을 의미하고, 메섹과 두발, 고멜, 도갈마 지역은 일반적으로 현재의 터키 지방입니다. 바사는 페르시아 즉, 현재의 이란이며, 구스는 에티오피아 붓은 리비아를 포함한 알제리, 튀지니, 모로코로 보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는 러시아가 아랍 연합군의 맹주 역할을 하여 전쟁을 주도하여 평안히 거하는 이스라엘을 칠 것이라는 예언이 나타나 있습니다.

17.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옛적에 내 종 이스라엘 선지자들을 빙자하여 말한 사람이 네가 아니냐 그들이 그때에 여러 해 동안 예언하기를 내가 너를 이끌어다가 그들을 치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하셨다 하라 18.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날에 곡이 이스라엘 땅을 치러 오면 내 노가 내 얼굴에 나타나리라 19.내가 투기와 맹렬한 노로 말하였거니와 그날에 큰 지진이 이스라엘 땅에 일어나서 20.바다의 고기들과 공중의 새들과 들의 짐승들과 땅에 기는 모든 벌레와 지면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내 앞에서 떨 것이며 모든 산이 무너지며 절벽이 떨어지며 모든 성벽이 땅에 무너지리라 21.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내 모든 산 중에서 그를 칠 칼을 부르리니 각 사람의 칼이 그 형제를 칠 것이며 22.내가 또 온역과 피로 그를 국문하며 쏟아지는 폭우와 큰 우박덩이와 불과 유황으로 그와 그 모든 떼와 그 함께한 맣은 백성에게 비를 내리듯 하리라 23.이와 같이 내가 여러 나라의 눈에 내 존대함과 거룩함을 나타내어 나를 알게 하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39:1.그러므로 인자야 너는 곡을 쳐서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 곡아 내가 너를 대적하여 2.너를 돌이켜서 이끌고 먼 북방에서부터 나와서 이스라엘 산 위에 이르러 3.네 활을 쳐서 네 왼손에서 떨어뜨리고 네 살을 네 오른손에서 떨어뜨리리니 4.너와 네 모든 떼와 너와 함께한 백성이 다 이스라엘 산 위에 엎드러지지라 내가 너를 각종 움키는 새와 들짐승에게 붙여 먹게 하리니 5.네가 빈 들에 엎드러지리라 이는 내가 말하엿음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6.내가 또 불을 마곡과 및 섬에 평안히 거하는 자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7.내가 내 거룩한 이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알게 하여 다시는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않게 하리니 열국이 나를 여호와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8.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볼찌어다 그 일이 이르고 이루리니 내가 말한 그날이 이날이니라 9.이스라엘 성읍들에 거한 자가 나가서 그 병기를 불 피워 사르되 큰 방패와 작은 방패와 활과 살과 몽둥이와 창을 취하여 칠 년 동안 불피우리라 10.이와 같이 그 병기로 불을 피울 것이므로 그들이 들에서 나무를 취하지 아니하며 삼림에서 벌목하지 아니하겠고 전에 자기에게 약탈하던 자의 것을 약탈하며 전에 자기에게서 늑탈하던 자의 것을 늑탈하리라11.그날에 내가 곡을 위하여 이스라엘 땅 곧 바다 동편 사람의 통행하는 골짜기를 매장지로 주리니 통행하던 것이 막힐 것이라 사람이 거기서 곡과 그 모든 무리를 장사하고 그 이름을 하몬곡의 골짜기라 일컬으리라 12.이스라엘 족속이 일곱 달 동안에 그들을 장사하여 그 땅을 정결케 할 것이라 13.그 땅 모든 백성이 그들을 장사하고 그로 말미암아 이름을 얻으리니 이는 나의 영광이 나타나는 날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14.그들이 사람을 택하여 그 땅에 늘 순행하며 장사할 사람으로 더불어 지면에 남아 있는 시체를 장사하여 그땅을 정결케 할 것이라 일곱 달 후에 그들이 살펴보되 15.순행하는 자가 그 땅으로 통행하다가 사람의 뼈를 보면 그 곁에 표를 세워 장사하는 자로 와서 하몬곡 골짜기에 장사하게 할 것이요 16.성의 이름도 하모나라 하리라 그들이 이와같이 그 땅을 정결케 하리라 17.너 인자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는 각종 새와 들의 각종 짐승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모여오라 내가 너희를 위한 잔치 곧 이스라엘 산 위에 예비한 큰 잔치로 너희는 사방에서 모여서 고기를 먹으며 피를 마실찌어다 18.너희가 용사의 고기를 먹으며 세상 왕들의 피를 마시기를 바산의 살찐 짐승 곧 수양이나 어린 양이나 염소나 수송아지를 먹듯 할찌라 19.내가 너희를 위하여 예비한 잔치의 기름을 너희가 배불리 먹으며 그 피를 취토록 마시되 20.내 상에서 말과 기병과 용사와 모든 군사를 배불리 먹을찌니라 하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움으로 이 엄청난 연합군을 완벽하게 물리치고 대승을 한다는 내용입니다. 성경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해보이는 불가능한 이스라엘의 승리가 가능한 이유는 기적적인 승리를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에스겔 39:6,7절) 2,500여년 전에 기록된 이 예언이 현재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요? 이 예언은 2022년 현재 진행 중인 예언이기 때문에 의심에 찬 여러분이 굳이 고대 문서를 뒤지지 않아도 됩니다.

최신 인터넷 국제 뉴스나 신문을 뒤져보시면 이 예언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예언이 아직 완전히 성취된 것은 아니지만, 현재 이 예언이 성취되는 것과 너무나 유사한 상황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현재 중동 정세의 중요한 이슈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란의 핵개발 문제 때문에 이스라엘의 벤자민 네탄야후 전 총리는 필요하면 자신의 다음 임기가 끝나기 전까지 이란 핵시설을 독자 공격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바 있습니다. 이에 대응하여 이란과 군사 동맹을 맺고 있는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이보다  전 '테헤란을 공격하는 것은 곧 모스크바를 공격하는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의 교전으로 아랍 세력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날로만 악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에스겔 38:3,4절의 말씀을 보면,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 곡아 내게 너를 대적하여 너를 돌이켜 갈고리로 네 아가리를 꿰어 전쟁을 이끌 것’ 이라는 예언이 있는데, 이는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격할 경우, 러시아가 불가피하게 참전할 수 밖에 없음을 시사합니다. 현재 이스라엘은 주변 접경국인 시리아와 끝없이 마찰을 빚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이스라엘이 하마스와의 전쟁을 빌미로 가자지구에 맹렬한 공습을 가했을 뿐만 아니라 지상군 투입까지 경고하고 있습니다.

2022년에는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시도를 빌미로 하여 우크라이나를 불법적으로 침략하여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공격하기 위해 이란과 군사 동맹을 맺어 이란으로부터 무기를 공급받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은, 주변의 아랍 세력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인 공공의 적으로 전락한 상황입니다. 물론, 에스겔서의 예언이 성취되려면 어떤 사건을 계기로 인해 아랍 연합군이 형성되고 러시아가 맹주로 참전하여 이스라엘을 공격해야 본격적으로 예언이 성취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 예언이 성취된 것은 아니지만, 너무나 분명한 것은 2,500여년 전에 기록된 한 선지자의 예언이 오늘날의 국제 정세와 놀랍도록 유사하게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고,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경계심을 가지고 향후의 움직임을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중 혹시, '그거 뭐 어쩌다가 들어맞을 수도 있지’라는 끝없는 의심을 제기하시는 분도 분명히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만일 그런일이 어쩌다가 있을수도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여러분이 지금 2,500년 후의 국제 정세를 한 번 예측해보시기를 권합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성경의 예언을 끝까지 부정하더라도, 이스라엘이 고립무원 상태에서 러시아를 포함한 대연합군에 완승을 거두는 불가능한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그 때는 정말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성경에서 언급된 수많은 예언들을 역사적으로 검증해보았습니다. 과거에 기록되었던 수많은 예언들은 이미  확실하게 성취되었고, '마지막 때’에 일어날 것이라고 언급된 이스라엘의 회복과 전쟁에 대한 예언이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진행 중입니다.

수천년 전에 기록된 성경의 예언이 현재의 인류의 역사를 이토록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예언하고 있다는 사실은 성경이 결코 사람이 마음대로 꾸며낸 종교 경전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반증합니다.

다음 글에서는 앞으로 성취될 성경의 예언(부분적으로는 현재 진행되고 있습니다)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앞으로 인류의 역사가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하신 분은 반드시 다음 글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15. 앞으로 진행될 예언

지금까지는 현재까지 성취되었거나 현재 진행 중인 성경의 예언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다가올 앞날에 대해서는 어떻게 예언하고 있을까요? 우선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성경에서는 지구상의 안락한 삶이 결코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때가 되면(물론 그 때는 하나님 외에는 알지 못합니다), 인류는 종말의 시대로 접어들게 되고, 그 때에는 유사 이래 최대의 '7년 대환란’을 겪게 될 것이며, 이 기간이 끝나면 예수님께서 지상으로 재림하셔서 모든 사람을 심판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분명히 구체적인 시기는 알 수 없다고 못박고 있지만, 말세가 될 때 나타나는 징조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언급하며 대략적인 시기는 판별할 수 있으므로 항상 깨어서 준비하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세에 대한 예언은 다니엘, 에스겔, 마태복음, 고린도전서, 데살로니가전서, 디도서, 이사야, 예레미야, 요한계시록 등 수많은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내용은 앞서 살펴본 에스겔 38장의 예언처럼 분명한 것도 있지만, 온갖 비유와 상징적인 표현이 가득한 요한 계시록의 예언도 있습니다. 따라서, '종말론’에 대한 해석은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첨예한 논란거리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가장 심한 논란 거리가 되는 것은, 신실한 성도가 환란기를 전후하여 하늘로 들려 올라 간다는 '휴거’인데, 이 현상이 ‘7년 대환란’ 이전이냐, 환란 중간이냐, 환란 이후냐에 따라 첨예한 대립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상징이 아닌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입장에서는 교회와 성도의 휴거가 7년 대환란 이전이나 환란 중간기 때 있을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중론입니다. 따라서, 제가 지금 제시하는, 일반적인 종말 예언 해석에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대략적인 순서를 언급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5.1. 예언의 타임라인

  1. 말세가 되면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종말의 징조가 나타난다. (마태복음 24장, 디모데 전서, 디모데 후서, 갈라디아서 등)
    • 전쟁과 지진, 기근, 전염병의 창궐
    • 하늘에 이상하고 무서운 징조의 출현
    • 유대인의 고토 귀환과 이스라엘의 건국
    • 적그리스도의 출현, 배도
    •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
    • 이단들의 득세, 세상적인 향락과 쾌락주의의 만연
    • 배금주의, 인간성 상실, 선을 행치 않고 불의을 일삼음, 사랑이 식음
    • 자식이 부모를 거역하고, 부모가 자식을 학대함
  2.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 안에 내주하여 악을 막는 자인 성령이 이 땅에서 거두어짐. (데살로니가 후서 2장)
  3. 러시아과 아랍 동맹국들에 의한 이스라엘의 침략(에스겔 38장, 39장)
    • 이 무렵을 전후하여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휴거(공중으로 들려올림)될 것으로 추측됨(데살로니가 전서 4:14-18, 고린도전서 15:51- 58, 디도서 2:13)
  4. 적그리스도가 세계의 패권을 장악 (다니엘 7:24,8:25,9:27,11장,12:11 요한 계시록 6장)
  5. 적그리스도가 이스라엘과 7년 평화조약을 맺음 (다니엘 9:27, 에스겔 38:8)
    • 세계정부가 적그리스도와 결합하여 그 독재자의 세계지배의 초기 단계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담당(요한 계시록17장)
  6. 매매 수단인 666 표를 손이나 이마에 받게 하게 이를 받지 않는 사람은 죽임.
  7. 대환난이 시직될 때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심판이 이 땅에 임하기 시작(요한 계시록 6장, 7인의 심판)
  8. 7년 대환난 기간의 중간 지점인 3년반에 일련의 극적 사건들이 발생한다.
    • 요한 계시록 12:7-13
    • 요한 계시록 6:17,8:1.9:1,12
    • 요한 계시록 8-9장 : 일곱나팔의 심판
    • 적그리스도가 그 악마적인 성품과 극악한 목표를 드러낸다.
      • 다니엘 9:2, 데살로니가전서 2:4, 요한 계시록 8-17장
      • 마태복음 24:15-24, 요한 계시록 12:14-16
      • 요한 계시록 14장, 요한 계시록 7:9-17,13:15, 요한 계시록 11:7-12
  9. 7 년 대환난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는 또 다른 일련의 무서운 사건들이 있다.
    • 일곱 대접의 심판 : 요한 계시록 계16장
    • 아마겟돈 전쟁
      • 요한 계시록 16:14-16, 스가랴 12:3,13:8-9,14:1-2
      • 요한 계시록 13:5-17,14:20,16:14,17:16-17,19:11-15, 요엘3:10-16
      • 요한 계시록 19:20
      • 요한 계시록 20:1-3
      • 마태복음 25:31-46
  10. 그리스도의 천년통치가 시작
    • 요한 계시록 20:4-6
    • 시편 2:6, 이사야 9:6-7,11:6-7,9, 42:3-4, 65:20-25, 예레미야 3:17, 스가랴 14:16, 로마서 8:21-23
  11. 천년 왕국 후의 사탄의 마지막 반역, 그리고 패배와 처형 (요한 계시록 20:7-9,20:10)
  12. 백보좌 심판(계20:11-15)
  13. 그 나라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다시 하나님께 돌려짐(이사야 12:12,고린도전서 15:24-28)
  14. 현재의 하늘과 땅은 불타 없어지고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설 (베드로후스 3:10,요한게시록 21:1-7, 22 장)

처음 접하시는 분은 어렵고 복잡하게 느껴지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그토록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던 성경의 수많은 내용들이 역사적 진실임을 확인했지 않습니까?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상식적으로 결코 있을 수 없는 이스라엘의 건국과 메마른 황무지가 옥토로 변하는 기적적인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었고, 에스겔서에 예언된 3차 중동 전쟁의 서막이 무르익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과연 이렇게 제시된 내용들이 정말로 허황된 이야기일가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위에 언급된 말세의 징조들이 너무나 뚜렷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15.2. 말세의 징조

위의 일련의 사건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말세가 되면, 한마디로 '죄악’과 '쾌락’이 극도로 치닫고, 또한 각종 자연 재해와 알수 없는 전염병들이 창궐합니다. 이 상황에서 앞에서 살펴 본 곡과 마곡의 전쟁이 발생하고, 이 때를 전후해서 신실한 성도는 하늘로 들려올라가 이후에 있을 대환란의 기간을 피하게 됩니다.

말세가 되면, 적그리스도라는 자가 출현해서 ‘자칭’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며 세계를 지배하는 통치자로 군림하게 되는데, 다니엘서의 예언에 따르면, 이 인물은 현재의 유럽 연합에서 출현할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이 적그리스도는 대환란기 7년의 전반기 즉, 전 3년 반까지는 실체를 드러내지 않다가, 후 3년 반이 지나면 본색을 드러내게 되는데, 이 때 손이나 이마에 신분인식과 매매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는 666 표를 받지 않는 사람은 죽입니다.

요한 계시록에서는 이 표를 받는 사람은 지옥행이라고 경고하고 있으므로 결코 이 표를 받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대환란 후 3년 반에 이르게 되면 상상할 수 없는 수많은 각종 자연재해와 재난이 닥치게 되고 수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 환란기간이 끝나면 예수님이 재림을 하는데, 이스라엘의 ‘므깃도’ 지역에서 사탄의 세력들이 연합하여 하나님의 향한 인류 최후의 전쟁인 ‘아마겟돈’ 전쟁을 벌입니다. 하지만, 사탄은 결국 패하고, 이후 예수님이 이 땅을 다시 천 년 동안 통치하게 됩니다.

천 년이 지나고 나면 사탄이 마지막으로 발악을 하지만 결국 패배하고, 이후 모든 인류는 예수님 앞에서 심판을 받으며 영원한 천국과 영원한 지옥으로 갈리게 됩니다.

15.3. 종말론의 해석

앞서도 언급했지만, 종말에 대한 해석은 너무나 다양합니다. 천년 왕국의 천년을 문자 그대로 천년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지만 상징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7년 대환란의 끔찍한 재앙들을 문자 그대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역시 상징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마게돈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성경을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하면 자의적인 해석에 의한 오류에 빠지기 쉽기 때문에 최대한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습니다.

15.4. 앞으로 경험할 말세의 현상

성경에 기록된 앞으로 닥칠 종말에 관한 예언은 완벽한 해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냥 무시해도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바로 '말세의 징조’가 너무나 뚜렷이 나타나고 있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직접 느끼는 바와 같이, 지금 전세계적으로 너무나 끔찍한 죄악과 범죄가 창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불과 십여년 전만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엽기적인 토막 살인, 초등학생 성범죄, 빈번한 자살, 음란, 폭력 등의 범죄가 난무하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오히려 하도 이런 뉴스에 익숙해져서 웬만한 범죄 기사에는 무감각해져버릴 정도입니다. 미국과 유럽을 포함한 전세계에서는 동성애를 합법으로 인정하려는 시도가 일어나고 있으며, 마약과 폭력, 범죄는 끝없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범죄는 유사 이래 늘 있어왔지만, 우리가 사는 이 시대만큼 폭발적으로 증가한 시대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죄악의 홍수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이에 무감각해져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말세가 되면 거짓 선지자와 배도가 일어날 것이라고 하고 있는데, 전세계적으로 수많은 거짓 선지자와 이단들이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교회는 가짜 복음으로 오염되고 있고, 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종교 통합과 WCC 운동이 일어나고 있으며, 기독교인들의 수는 날로만 줄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각종 전지구적인 지진과 쓰나미, 허리케인과 같은 자연재해의 발생 빈도도 최근 몇 년간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SARS나 신종 플루, 코로나 바이러스와 같은 유전자 변형에 의한 전염병이 새로 발생하고 있으며, 항균제에 내성을 가지고 있는 슈퍼 박테리아도 날로만 증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미국과 유럽에서 신분 확인과 개인정보 및 신용 결제가 가능한 미국에서 생체 인식 바이오 칩(verichip)이 개발되어 실제로 손이나 이마에 삽입이 시작되었습니다.

현재의 베리칩은 향후 눈에 보이지 않는 전자 타투의 형태로 발전되어 손목이나 이마에 이식될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요한 계시록에서 언급하는 666 짐승의 표로 보고 있습니다. 지금은 이제 시작 단계지만, 스마트폰의 사용이 확대에 따른 개인 정보 유출의 문제 해결과 결제 수단의 용이성을 빌미로, 조만간 이 짐승의 표의 생체 내 삽입이 전 세계로 퍼지게 될 것입니다.

결국 머지 않아 세계는 정보화의 발달로 완전한 신용화폐의 시대로 접어들게 될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칩을 이식받지 않은 사람들은 요한 계시록에 예언된 대로 매매가 불가하여 사회에서 생존하지 못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편리함이 주는 유익 때문에 칩을 받겠지만, 결국은 이 칩은 '빅 브라더’에 의한 시민 통제 수단으로 이용되고 사람들은 빅브라더의 통제를 받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 계시록에서는 짐승의 표를 받는 사람은 지옥에서 불과 유황 속에서 영원토록 고통을 당한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절대로 짐승의 표를 받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이 모든 예언과 더불어, 성경에서는 말세가 바로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시기가 되면 오게 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이스라엘의 회복은 1948년에 문자적으로 성취되었고 지금이 바로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마지막 때’를 살고 있는 세대인 것입니다.

말세와 종말에 대한 내용은 너무나 다루기 방대해서, 대략적인 내용만 다루었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마지막 때임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조금 더 확실한 징조가 나타나면 믿겠다고 하지 말고, 지금 빨리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믿기 바랍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15.4. 객관적 근거로 증명되는 성경의 사실성

지금까지 오랜 시간동안 '성경’을 기독교의 경전이 아닌, 중동지방에서 전해져 내려온 고대 문서의 관점에서 역사적, 고고학적 잣대를 통해 검증해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성경을 막연하게 다른 종교의 경전 내지는 믿기 힘든 신화로 점철된 책 정도로만 생각하셨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실을 알고 보니 어떻습니까?

성경은 여러분이 막연하게 생각하는 그저 그런 '신화’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모두 똑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저그런 수많은 종교 설화나 고대 기록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역사성과 사실성이 입증된 역사서입니다.

불경은 어떻습니까? 코란은 어떻습니까? 사이비 종교의 교주가 즉석에서 만들어낸 교리는 어떻습니까? 단순히 쉽사리 받아들이기 힘든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내용이 있다면 모든 종교가 다 똑같습니까?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객관적이고 상식적인 검증의 잣대를 갖다대면 성경을 제외한 그 어떤 '종교 경전’이나 '신화’도 이 깐깐한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막연하게 다른 신화나 종교 경전과 동급으로 취급했다면, 이런 객관적인 검증의 과정을 몰랐고, 성경이 그 정도로 치밀하고 정확한 역사를 다뤘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많은 사람은 종교는 결국은 다 같은 것이라고, 모든 종교의 가르침은 일맥상통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산에 올라가는 길은 다를 수 있어도 결국 정상에는 똑같이 도달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종교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종교를 단순히 사람이 자신의 마음의 평안을 얻고 힘들 때 의지할 곳을 찾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사상 체계라고 정의한다면, 위의 말은 절대적으로 맞습니다. 기독교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에서도 다 사랑과 자비를 강조하고 악을 멀리하고 마음의 평안을 누릴 것을 가르칩니다.

종교의 정의가 그렇다면, 누구나 자신의 뜻대로 적당히 '사상 체계’를 정비해서 '아름다운 '종교’를 창시할 수 있고 그들은 서로 통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와 예수님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종교나 사상체계가 결코 아닙니다. 기독교와 예수님은 종교나, 인간의 사상의 산물이 아닌 '살아있는 역사’이자 '사실’입니다.

모든 종교가 일맥상통하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만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역사적 기독교가 배타적인 이유는 오직 기독교만이 인간이 마음대로 꾸며내지 않은 '역사적인 진실’이고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16. 우주의 기원에서 확인하는 하나님의 증거

지금까지 성경의 역사성과 진실성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성경은 그냥 신비한 이야기가 난무하는 수많은 고대 종교 경전 중의 하나’라는 막연한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분명히 깨달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아직 여러분이 성경과 예수님을 믿지 못한다면 아마 '과학’이라는 거대한 산 때문일 것입니다

‘성경이 단순한 신화가 아닌 역사적 진실을 기록한 책이고, 정말로 신적인 존재가 개입되었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현대 과학과 완전히 모순되는 성경의 주장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라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 또한 결코 어설프게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나와 있는 사실이 객관적으로 사실로 입증된 과학과 배치되거나 모순된다면, 이는 성경이 거짓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거나 중고등학교 때 배운 과학지식과 성경의 내용과는 완전히 '반대’되거나 상호간에 결코 타협할 수 있는 상당한 모순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보입니다. 한 번 살펴볼까요?

현대 과학에서는 우주는 어느 특정한 과거 시점에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대폭발’에 의해 형성되어 지속적으로 팽창하고 있거나(빅뱅 이론), 혹은 우주에는 시작과 끝이 없이 존재해 왔으며, 물질이 연속적으로 형성되어 균일한 밀도를 가지고 있다는 정상 우주론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현대 과학에서는 생명의 기원에 대해, 원시 대기에 포함된 몇가지 원소들을 재료로 하여, 전기 자극이 가해져 생명체의 구성성분인 아미노산이 형성되었고, 이들이 조합되어 원시적인 생명체가 출현하였으며, 이들이 끝없는 진화를 통해 각종 생물로 분화하였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이 모든 생물을 ‘각기 종류대로’ 창조하셨다고 이야기 합니다.

비단 우주와 생명의 기원 뿐만 아니라, 천문학, 물리학, 지질학, 생물학, 지구과학, 인류학 등 수많은 과학의 영역에서 현대 과학은 성경을 부정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 정말로 그렇다면, 아무리 성경이 역사적으로 신뢰할 문서임을 알았다고 해도, 우리는 합리적으로 성경이 진실임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과연 성경의 내용이 현대 과학과 정말로 상충되는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따져보겠습니다. 이 모든 영역을 다루기에는 너무나 방대하기 때문에, 가장 핵심적이고 논란이 되는 우주와 생명의 기원, 그리고 진화론과 창조론에 대한 핵심적인 부분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다루겠습니다.

16.1. 우주의 기원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와 지구를 포함한 만물은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여러분과 제가 비록 전문적인 과학적 지식이 없다고 할지라도,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이러한 것들이 존재하는데에는 어떤 '원인’이 있다는 것이죠.

여러분이 집에 컴퓨터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누군가가 ‘아 그건, 원래부터 아무 이유없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 이라고 주장한다면 여러분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하겠죠? 여러분 방에 컴퓨터가 있는 이유는, 여러분이 컴퓨터를 어딘가에서 사오거나 얻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컴퓨터가 존재할 수 있었던 원인은 누군가가 컴퓨터의 부품을 조립했기 때문이고, 그 컴퓨터의 부품이 존재한 원인은 그 부속품의 재료가 되는 물질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 끝없이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결국 정말로 가장 기본이 되는 그 물질(분자나 원자 수준까지 올라갈 것입니다)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었을까요? 그냥 아무 이유없이 원래부터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비단 컴퓨터 뿐만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 물, 공기, 산, 들, 동물, 사람, 지구, 별, 은하 등, 모든 우주만물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러한 만물과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 과학자들은 두 가지 가설을 제안했습니다. 첫 번째 이론은 우리가 익히 들어온 빅뱅 이론이고 나머지는 다소 생소한 정상 우주론입니다.

현대 우주론에 따르면 태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을 가정합니다. 은하도 별도 원자도 없었고, 시간과 공간마저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처음 시간과 공간이 태어나는 시점을 우리는 대폭발, 혹은 빅뱅(big bang)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그 전에는 무(無)의 세계, 알 수 없는 세계입니다.

현대 우주론의 출발점은 1917년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 주창한 정적 우주론에 있었습니다. 정적 우주론이란 "우주는 팽창하지도, 수축하지도 않는 정지 상태에 있다."는 이론입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발견한 일반 상대성 이론을 막상 우주에 적용해보니, 정지 상태의 우주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우주는 바깥쪽으로 혹은 안쪽으로 폭발하는 상태여야 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는 정지 상태의 우주론을 설명하기 위해 '우주 상수’라는 인위적인 상수를 도입하여 방정식을 의도적으로 수정합니다.

그런데 1916년에 발표된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을 면밀히 살핀 러시아의 수학자 프리드만(Friedman)과 벨기에의 천문학자 르메트르(Lemaitre)는 이에 반론을 제기합니다.

프리드만은 1922년 "우주는 극도의 고밀도 상태에서 시작돼 점차 팽창하면서 밀도가 낮아졌다"는 논문을, 르메트르는 1927년 "우주가 원시원자들의 폭발로 시작됐다"는 논문을 각각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생각과 달랐던 그들의 논문을 무시해버렸습니다.

그러던 중 아인슈타인에게 충격적인 사건이 1929년에 발생합니다. 미국의 천문학자 허블(Edwin Powell Hubble)이 은하들이 후퇴하고 있음을 관측해 우주가 팽창한다는 사실을 발표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아인슈타인은 1931년 "우주는 무한하고 정적이다"라는 당시의 상식에 맞추기 위해 억지로 우주상수를 도입했던 것을 철회하고 우주가 폭발하여 팽창한다는 이론을 받아들였습니다.

초기 우주의 모습을 처음으로 계산해낸 과학자는 프리드만의 제자인 러시아 출신의 미국 물리학자 조지 가모프(George Gamov)였습니다. 그는 1946년 초기 우주는 고온고밀도 상태였으며 급격하게 팽창했다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또한 우주 초기에는 온도가 너무 높아 무거운 원자들은 존재할 수 없었고, 이때 생긴 수소(75%)와 헬륨(25%)이 현재 우주 질량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1948년 미국의 물리학자 랠프 앨퍼(Ralph Asher Alpher)와 로버트 허먼(Robert Herman)은 초기 우주의 흔적인 복사선(우주배경복사)이 우주 어딘가에 남아 있으며, 그 온도는 - 268°C일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허블이 발견한 은하들의 적색이동, 가벼운 원소들의 풍부한 존재, 우주배경복사에 근거를 두고, 우주는 특정한 아주 오랜 과거 시점에 초고온, 고밀도의 한 점에서 폭발하여 시작되어 지속적으로 팽창하고 있다는 것이 대폭발이론, 즉 빅뱅우주론입니다.

그런데 호일(Fred Hoyle), 본디(Hermann Bondi), 골드(Thomas Gold)등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천문학과 교수들은 빅뱅이론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우주의 시간을 거꾸로 돌리면 원시 우주에는 모든 물질(현재 우주의 모든 것)이 한 점에 모이는 초고온 초밀도의 특이점이 생기는데, 이를 물리학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으므로 그들은 납득하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1948년 ‘정상우주론’(steady state cosmology)을 발표하였습니다.

정상 우주론(steady state cosmology)에서는 우주가 시공간적으로 균일할 뿐만 아니라 등방적이기 때문에, 우주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늘 같은 꼴이며, 우주에는 시작과 끝이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또 우주는 모든 방향으로 같은 비율로 늘어나기 때문에 허블 법칙도 만족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처럼, 관측사실과 잘 일치하고, 특이점을 피할 수 있는 정상우주론은 학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빅뱅이론과 선의의 경쟁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수모를 당하던 빅뱅 이론을 지지할 결정적인 증거가 나타나게 됩니다. 1964년 벨연구소에 근무하던 독일 태생의 미국 천체물리학자 아노 펜지아스(Arno Allan Penzias)와 로버트 윌슨(Robert Woodrow Wilson)이, 1948년 앨퍼와 허먼이 예언했던 우주배경복사를 발견한 것입니다.

우주배경복사의 온도는 영하 269.5°C(3.5K)로 예언과 1.5°C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고 이들은 허블의 우주팽창 이후 최고의 관측이라고 불리어지는 우주배경복사를 발견한 공로로 1978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는데, 이는 정상 우주론의 이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발견이었습니다.

또한, 정상 우주론(steady state cosmology)에서 주장하는 우주 공간이 팽창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물질이 '무’에서 생겨나 우주 공간을 계속 메울 것이라는 가설(물론 객관적인 증거는 없습니다)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물질은 새로 파괴되지도, 창조되지도 않는다는 열역학 제 1법칙에 위배되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이에 따라, 정상 우주론(steady state cosmology)은 현대 천문학에서 사장되어 버리고, 빅 뱅 이론이 우주의 기원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표준 모델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복잡한 것 같지만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주의 기원에 대해 빅 뱅 이론과 정상 우주론이 대립하고 있었는데, 과학적인 증거가 밝혀짐에 따라 정상 우주론은 폐기되고 빅 뱅 이론이 우주의 기원의 정설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런데, 빅 뱅 이론의 핵심은, 우주가 시작도 끝도 없이 ‘원래’ 존재해 왔던 것이 아니라, '시작점’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반면, 정상 우주론은 우주는 '원래부터 존재했던 것이므로 자체의 원인이 없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이매모호한 사실이 대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사실과 대체 무슨 상관이 있냐는 의문을 제기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대단히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주에 시작점이 있느냐 아니면, 시작점이 없이 원래부터 존재했느냐의 여부가 바로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했다라는 사실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16.2. 칼람의 논증

아무 관계없어보이는 이 둘을 연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칼람의 논증’이라는 논리를 알아야 합니다.

칼람의 논증은 다음과 같습니다.

대전제: 모든 존재하기 시작한 것에는 원인이 있다
소전제: 우주는 존재하기 시작했다
결론: 따라서, 우주에는 원인이 있다

대전제는 모두가 참이라고 받아들이는 사실입니다. 우주론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대전제가 아닌 소전제였습니다. '우주는 존재하기 시작했느냐(즉, 과거에 우주의 시작점이 있었는가) 아니면, 원래부터 존재했느냐’의 여부가 중요합니다. 빅뱅 이론이 과학적으로 확립되기 이전 고대 철학에서도 우주는 시작점이 없이 ‘원래부터 존재’ 했다는 설과 '우주의 시작점과 원인이 있다’는 설이 대립을 빚었습니다.

따라서, 대전제는 누구나 공통적으로 인정하더라도, 소전제에 대해서 의견이 갈렸기 때문에 우주에 원인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서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서, 천문학과 물리학을 통해 빅 뱅 이론이 정설로 인정됨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우주에 분명한 시작점이 있었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습니다.

따라서, 모든 존재하기 시작한 것에는 원인이 있는데, 우주는 존재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우주의 기원에는 원인이 있다는, 논리적으로 타당한 결론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죠.

이 사실은 '무신론자’들에게 엄청난 타격을 주었습니다. 우주에는 시작도 원인도 없을 것이라는 가설을 주장한 사람들은 사실 무신론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주장한 이유는 이렇게 주장해야만 아무 이유 없이 우주가 존재할 수 있으므로 신이 없다는 그들의 주장을 고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빅 뱅 이론을 반박하고, 무신론적 우주관에 합당한 설명을 하기 위해 그 이후에도 다양한 학설들(진동 우주론, 순환 우주론, 인플레이션 이론) 등이 제기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들 모두 과학적으로 입증된 증거는 없었고, 현재까지 밝혀진 과학적 법칙에 위배되는 것으로 밝혀져, 지금은 흥미있는 다양한 학설들 중의 하나 정도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빅뱅 이론과 그에 의해 확증된 칼람 논증에 따르면, 시간과 공간, 물질이 창조되기 시작한 어느 시점이 존재함을 의미하고 결국 이 시간과, 공간, 물질이 시작된 원인도 존재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원인은 시간과 공간, 물질을 초월한 존재여야 하기 때문에 '신’의 존재를 지지하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어야 한다면, '신’자체의 원인은 무엇이냐고 말이죠. 하지만, 이 논리에는 결정적인 논리적인 오류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하기 시작한’ 것에는 원인이 있다는 것이죠.

'신’은 시간과 공간, 물질과 비물질을 초월한 존재이고, 존재하기 시작한 시점이 없습니다. 원래부터 존재한 '초월적 존재’이며 그 자체가 원인이자 결과인 존재이므로 이 논리는 타당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신의 속성은 성경에 나온 '하나님’의 속성과 그대로 일치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빅 뱅’은 과학적 사실이고, 창조론은 신화이기 때문에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고 배치된다고 이야기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구체적으로 어떤 물리학적 법칙으로 만드셨다는 이야기는 물론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때문에 빅 뱅 이론이 성경과 배치되거나 성경을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분명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고, 이는 분명히 우주에는 시작점이 있었고, 그 시작의 원인이 되는 초월적인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나타냄으로써, 빅 뱅 이론과 칼람의 논증에서 도출되는, '우주의 시작’과 '신의 존재’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는 과정이 '빅 뱅’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은 상호 모순이 아니라 상호 간에 지지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과거에는 무신론자들이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과학을 동원하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과학적 사실이 정확하게 밝혀짐에 따라 무신론자들이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오히려 과학을 왜곡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다음에는 생명의 기원과 진화론에 대한 과학적 진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7. 생명의 기원과 진화론의 오류 (창조론과 진화론)

원시 대기를 재료로 전기적인 자극이 가해져 우연히 생명체의 구성성분인 아미노산이 형성되었고, 이들이 조합되어 원시적인 생명체가 출현했다. 이들이 끝없는 진화를 통해 각종 생물이 나타났고 사람도 이러한 진화 과정의 산물이다.

생명의 기원에 대한 과학적 진실은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생명의 기원 = 진화론 = 과학적 정설 = 과학적 법칙’, ‘성경의 창조론 = 비과학적 = 종교적 믿음 = 허구’ 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혹시 이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현재까지 제시된 생명의 기원에 대한 가설과 진화론은 과학적 진실이고 창조론은 허구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7.1. 생명의 기원

생명의 기원에 대한 가장 고전적인 개념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원시 지구는 갖가지 화학 물질로 덮여 생명이 생성되는데 도움이 되는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번개를 통해 에너지가 공급되자 생명을 만드는데 필요한 갖가지 재료를 포함하고 있는 ‘원생액’ 속의 화학 물질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단순한 생명체가 출현했다.

그로부터 수십억년의 긴 세월을 거치는 동안 서서히 진화가 이루어져 고등한 생물로 발전하고, 서로 분화하면서 다양한 생물이 출현했다.

이러한 시나리오을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은 러시아의 생화학자 알렉산더 오파린이었습니다.

그는 1924년, 원시 지구에 존재하는 단순한 분자들이 진화하여 복잡한 분자와 생명체를 만들었다는 가설을 발표했습니다. 1928년 영국의 생물학자 홀데인은 원시 지구의 환경 속에서 활동하던 자외선이 당과 아미노산을 바다에 집중시켜 그 원생액으로부터 생명이 출현했다는 이론을 제시했습니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1955년, 시카고 대학의 스탠리 밀러에 의해 실험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밀러는 실험실 안에 원시 지구 환경을 재생하였고, 생명체의 '원료’로 작용할 것으로 생각되는 메탄, 암모니아, 물, 수소를 섞은 혼합물에 전기 자극을 가했습니다. 그 결과 생명체의 기본 구성 성분인 아미노산(단백질의 구성 요소)가 합성되었습니다. 그는 이 실험을 통해 생명체가 생명이 없는 화학 물질에서 생성될 수 있다는 실마리를 제공했습니다.

밀러는 이 실험 결과를 곧바로 사이언스(Science) 지에 발표하였는데, 그 충격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플라스크 안의 가스 조성은 초기 원시지구 대기의 것과 같다고 생각하였고, 무기물에서 생명체를 구성하는 유기화합물인 아미노산이 추출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과학계에서는 실험으로 생물이 화학물질로부터 무작위적이고 우연한 자연적 과정에 의해 생성될 수 있다는 과학적 증거를 얻었다고 생각하여 매우 흥분했습니다. 이에 따라, 수많은 과학자들도 밀러의 실험 결과를 '생명의 자연발생설’의 결정적인 증거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대략적으로 이 내용을 익히 알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생물의 원료가 되는 각종 재료가 섞인 상태에 모종의 전기적인 자극(번개, 열 등)이 가해지니, 생명체의 기본이 되는 아미노산이 생겨났습니다. 이런 아미노산이 또 여러 자극을 받아서 계속 연결되어 단백질이 생겨나고,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서 점점 복잡하게 발달되어 생명체로 진화하게 되었다는 이론입니다. 얼핏 보면 그럴싸하고, 과학적인 실험으로 입증되었으니, 아무 문제가 없어보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실험의 치명적인 문제점이 발견되었습니다.

첫 번째 문제점은, 지구의 초기 환경이 암모니아와 메탄과 수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가설에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고, 오히려 실제 원시 지구의 대기의 조성과는 전혀 달랐다는 점이 밝혀진 것이었습니다. 밀러가 실험에서 제시한 조합을 이용한 것은 아미노산을 만들어내기 위해 유리한 조건을 인위적으로 조성하기 위함이였습니다. 예를 들어, 질소나 이산화탄소 같은 기체로 실험하면 아미노산이 생성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1980년 이후로 미 항공우주국(NASA)의 과학자들은 원시 지구에 메탄이나 암모니아나 수소가 전혀 없었음을 밝혀냈습니다. 오히려 원시 지구는, 물, 이산화탄소, 질소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 화합물을 이용하면 밀러와 동일한 실험 결과를 결코 얻을 수 없었고, 이는 이후의 다양한 실험을 통해 확증되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대기를 이용해서 실험을 하면 모종의 유기 분자가 생성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실제 원시 지구의 대기에 가까운 상태에서 실험을 해서 생성된 물질은 '포름 알데히드’인데 이는 실험실에서 강력한 소독제로 이용되는 물질입니다. 생명체의 발생에 도움을 주기는 커녕 단백질을 파괴하는 물질이었습니다.

오파린과 밀러의 가설을 추종하는 과학자들은 위와 같은 중대한 오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비록 생명의 기본 단위인 아미노산은 생성되지 않더라도 모종의 유기 분자가 생성되기는 하니, 이 물질이 어떻게 해서든지 생명체가 되었을 것이라고 얼버무렸습니다.

둘째로, 밀러는 합성된 물질을 냉각기로 바로 냉각시켜서 콜드트랩에 농축시켰는데, 원시 지구에 어떻게 그런 고효율의 냉각 장치가 있어서 합성된 물질이 다시 분해되지 않도록 했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즉, 이는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거나 근거없는 합리화였던 셈이죠.

셋째로, 설령 아미노산이 우연히 생성되었다고 해도 생명체가 형성되기에는 너무나 험난한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는 난제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아미노산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생명체를 형성하지 못하고, 아미노산이 수백 개 이상 결합해서 단백질이 되어야 비로소 세포의 한 구성성분으로 작용할 수 있게 됩니다. 심지어는 이 단백질 하나조차 비유하자면, 거대한 건물의 벽돌 한 장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설령 아미노산이 우연히 생성되었다고 해도,이것들이 단백질로 합쳐지고, 단백질이 조합되어 세포가 되었다는 결론을 내리기는 지나치게 큰 비약이라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아미노산은 구조적으로 L형과 D형 두 가지가 있는데, 생명체를 구성하고 있는 단백질은 모두 L형이지만, 자연발생적으로 생기고 밀러의 실험에 의해 추출된 아미노산은 L형과 D형이 각각 1:1이었습니다. 따라서, 수백개의 아미노산으로 구성된 단백질이 밀러 실험 방식에 의한 L형 아미노산으로만 생성될 확률은 수학적으로 0에 가깝다는 치명적인 문제도 발견되었습니다.

심지어는 밀러 자신도 자신의 실험이 발표된 지 38년이 지난 1991년,

과거에 우리가 주장했던 원시 대양에서의 생명발생 학설은 이제와 생각하니 너무나 동화와 같은 이야기였으며, 태초에 생명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현재로서는 아무도 모른다

고 실토했고, 이어 1993년 Time 지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있었던 생명의 기원 학회에서 생물학자들에 의해 밀러의 이론은 공식적으로 '폐기’되었다고 보도하였습니다. 현재 밀러의 실험은 정상우주론과 같이 과학적으로는 아무 의미없이 폐기되었고, 단지 역사적으로 흥미로운 실험의 하나로 전락한 상태입니다.

밀러의 실험이 폐기된 이후, 생명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한 다양한 가설들이 제시되었지만 모두 근거가 없거나 황당한 내용을 다룬 것으로 사장되고 말았습니다. 대표적인 것들을 몇가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화학적 친화설이 있습니다. 1969년 딘 케년 (Dean Kenyon)은 아미노산이 올바른 순서로 저절로 연결되게 하는 모종의 내재적인 인력이 반드시 있으며, 바로 이를 통해 단백질 분자가 만들어지고 다시 거기서 살아있는 세포가 생겨났다고 주장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그럴 듯해 보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가설에는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과학자들은 정말로 아미노산이 다른 아미노산 옆에 나란히 자리를 잡는지 여부를 판별하기 위해 250개의 단백질의 서열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검증했는데, 아미노산의 순서는 화학적 친화와 전혀 무관함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결국 정작 이 가설을 제안한 케년 자신도 이 가설을 부인하게 되었습니다.

둘째로 자기 배열 성향 이론이 있습니다. 이는 특정 상황하에서 에너지가 매우 빠른 속도로 시스템을 통과하면 시스템이 불안정 상태가 되면서 좀 더 복잡해진 상태로 재배열을 이룬다는 설입니다. 욕조에서 물이 빠지는 것을 생각해보면, 처음에는 물이 무작위로 하수구로 빠지지만, 물이 다 빠질 무렵에는 자체적으로 물이 소용돌이를 형성하며 출구가 훨씬 질서 정연해지는 것과 비슷한 개념입니다.

이 개념도 얼핏 생각해보면 그럴 듯해 보이지만, 물이 빠질때의 규칙성과 생명체가 형성되는 수준의 규칙성 간의 복잡성 간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차이가 존재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웠습니다.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라는 것이죠. 저명한 정보 이론가 Hurbert Yockey는 '질서의 개념을 생물학적 조직과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정밀 검사를 통과할 수 없는 말장난’이라고 했습니다.

셋째로 ‘우주에서 날아온 씨’ 가설이 있습니다. 지구상의 화학적 진화에 대한 감당 못할 장애물 때문에 시름에 빠진 과학자들은 생명체의 기본 구성 단위가 우주의 다른 곳에서 날아왔다는 기상천외한 이론을 내세우기에 이릅니다. DNA의 이중 나선구조를 발견하여 20세기 생물학계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친 프랜시스 크릭이 주장하기도 해 화제를 모았던 이론이기도 합니다. 이를 주장하는 과학자들은 세포 크기만한 살아있는 분자들이 대기에서 불타지 않은 채 지구에 도달했을 수 있다고 추론했습니다. 크릭과 레슬리 오겔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우주에 존재하는 어느 진보된 문명에서 지구를 황야 지대나 동물원, 우주의 쓰레기장으로 만들 목적으로 지구에 생명 인자를 보냈을 수도 있다고 주장하기까지 했습니다.

이 역시 굳이 반박할 필요조차 없는 이론으로, 역시 분명한 과학적 근거가 있어서 이 이론이 나온 것이 아니라, 생명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억지로 끼워맞추기 식으로 설명을 만들어냈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또한, 설령 외계에서 그러한 물질이 지구로 날아왔다고 하더라도, 외계의 그 물질의 근원은 어디냐는 물음이 남는다는 근본적인 문제도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심해의 열수공에서 뜨거운 열이 화합물에 가해져 유기 분자가 형성되었다는 심해 열수공 이론, 생명이 흙으로부터 나왔다는 스미스의 이론 등이 제시되고 있으나 이들 모두 아무런 과학적인 근거가 없는 단순한 '끼워맞추기식 가설’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이처럼, 생명의 기원에 대한 수많은 그럴싸해보이는 가설들도 새로운 과학적 사실이 발견됨에 따라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명이 난 상황입니다. 생명의 기원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 없는 가설’이야 누구나 마음대로 '창작’해서 꾸며낼 수 있지만, '객관적인 과학적 근거’에 바탕을 둔 해답은 그 누구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17.2. 다윈의 진화론, 과연 진실인가?

진화론이란 생물이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환경에 따른 변화가 축적되고 나아가 새로운 종의 탄생을 야기한다는 이론입니다. 진화론의 핵심은, 적자 생존에 의한 자연 선택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진화론에 따르면, 자신이 처한 환경에 순응하거나 환경적인 요인을 극복하는 생물은 살아남고 그렇지 못하는 '패자’는 결국 도태됩니다. 이렇게 환경에 적응하거나 극복하는 과정에서 생물에 변화가 나타나고, 이런 '미세한 변화’가 오랜 세월 동안 '누적’되고 후대에 전달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생물, 즉 새로운 종이 나타난다는 이론입니다. 여기서 다윈이 주장하는 '미세한 변화’는 오늘날 생물학적인 관점에서는 '유전자의 돌연변이’로 설명합니다.

얼핏 생각하면 대단히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고, 다양한 생물의 기원과 분화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이론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다윈이 이 이론을 주장한 19세기에는 진화론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으나, 비약적으로 생물학적인 발전이 이루어진 20세기에 들어서 진화론의 치명적인 문제점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진화론에서는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돌연변이’가 누적되어 '유전자의 변화’가 일어나고(유전자의 변화는 곧 표현형, 즉 형질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후대로 유전되고 누적되어 새로운 종이 출현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유전자의 다양성과 변화 과정은 수백만년간에 걸친 무수한 무작위적인 돌연변이의 누적과 자연 선택의 결과라고 주장했습니다.

20세기 중반 왓슨과 크릭에 의해 DNA의 이중 나선 구조가 밝혀짐에 따라 현대 생물학계는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고, 유전자와 돌연변이의 메커니즘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밝혀진 사실은 진화론에 치명타를 주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진화의 원동력으로 생각했던 ‘유전자의 변형’, 즉, 돌연변이의 발생 빈도자체가 매우 낮은데다 절대 다수의 돌연변이는 생물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돌연변이의 발생 빈도는 종이나 유전자에 따라 각기 다르기 때문에 한마디로 요약하기는 어렵지만, 평균적으로 10만 내지 100만 세대에 한 번 정도 돌연변이가 일어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더 재미있는 사실은 생물의 세포 내에는 이렇게 드물게 일어나는 돌연변이를 복구하는 놀랍도록 정교한 메커니즘도 자체적으로 갖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유전학자가 유익한 돌연변이와 해로운 돌연변이의 빈도에 대해 조사한 결과 유익한 돌연변이는 186개인 반면, 해로운 돌연변이는 453,732가지로 유익한 돌연변이/해로운 돌연변이의 비가 0.00041임을 컴퓨터 분석을 통해 발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장 치명적인 질병의 하나인 암의 원인 근본 원인도 유전자의 돌연변이이고, 거의 4,000여가지의 질병의 원인이 DNA의 돌연변이임이 알려져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한가지 종류의 생물이 다양한 종류의 생물로 분화하려면, 다양한 종류의 돌연변이가 많이 누적되어, 후대에 유전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돌연변이라는 현상 자체가 매우 낮은 빈도로 발생했을 뿐만 아니라, 설령 돌연변이가 발생하더라도, 절대 다수가 생물의 생존에 악영향을 끼쳐 죽게 만들거나 도태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돌연변이가 많이 누적되어 적자가 생존하여 후대에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돌연변이가 누적된 종은 오히려 도태되어 제거되고, 돌연변이가 없는 멀쩡한 종이 살아나서 후대에 변형되지 않은 유전자를 전해준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지요. 물론, 돌연변이가 발생하여 변형된 유전자도 '유전자’이므로 고스란히 유전되지만, 이렇게 '변형’된 개체는 다른 '종’으로 '진화’가 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도태되어 사라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사실, 유전자의 '변이’가 모두 '돌연변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과 제가 똑같은 사람이고, 똑같이 눈, 코, 손, 발, 다리, 내장기관을 가지고 있지만, 미세한 차이가 있죠? 그 이유는 여러분의 유전자와 제 유전자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의 눈 색깔을 결정하는 유전자와 제 눈색깔을 결정하는 유전자를 비교하면, 똑같은 사람의 눈 색깔을 결정하는 유전자이므로 원래는 같아야 하지만 실제는 미세한 염기서열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러한 개체간의 '정상적인 수준에서 드물지 않고 비교적 흔하게 나타나는 유전자의 차이’는 '돌연변이’가 아니라 ‘다형성’이라고 합니다.’ 다형성’은 비정상적이거나 드문 현상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이고 흔한 현상이라는 점에서 돌연변이와 구분이 됩니다. 이러한 '다형성’이라는 기전을 통해 여러분과 제 눈 색깔이 미세하게 다르고, 개체간에 각종 신체적인 특성에 차이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다형성도 유전자의 '변화’에 의한 결과이고, 이것도 고스란히 후대에 유전되지만, 이러한 다형성에 의한 변화는 돌연변이와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첫째는, 다형성은 유전자의 변이는 한 개의 염기 서열 단위로 일어나기 때문에 유전자 전체 수준에서는 큰 변화가 없다는 점이고, 둘째는, 이러한 단일염기다형성은 대부분 무증상이거나 미세한 기능상의 이상만 초래할 뿐, 개체의 생존에 직결될 정도로 심각한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즉, '다형성’은 그 자체의 변이 수준이 작기 때문에 그만큼 변화도 작다는 것을 의미하고, 돌연변이는 흔하지 않은 부위에 변화가 일어나거나 유전자 변형의 수준이 크게 발생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개체에도 심각한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절대 다수라는 것이죠.

혹자는 이런 단일염기다형성의 개념과 돌연변이의 개념을 혼동하기 때문에, 다형성도 유전되니, 이것이 누적되면 새로운 종이 나타날 수 있지 않느냐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잘못된 개념입니다. 이는 자동차의 엔진을 수리할 때, A사의 부품 대신 B사의 부품으로 갈아끼웠다고 엔진이 핸들로 바뀌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똑같은 자동차 엔진이라는 점은 불변하되, 다만 엔진 성능상의 미세한 변화가 나타나는 것 뿐이지, 부품이 갈렸다고 엔진이 핸들로 바뀌는 것은 아니죠? 반면, 엔진의 주요 부품을 여러개를 바꾸고 그것도 엉뚱한 부품으로 갈아끼운다면 엔진 자체가 작동을 하지 않고 못쓰게 되겠죠? 이것이 바로 돌연변이입니다.

설령, 유전자의 변이가 다형성으로 나타나건 돌연변이로 나타나건 새로운 변화가 누적된다고 해도 지극히 단순한 유전자 배열을 가진 하등 생물에서 고등생물로 진화할 확률은 천문학적으로 낮습니다. 또한, 돌연변이가 누적되어 새로운 유전자로 바뀐다는 것을 가정해도 단백질 서너개 변화 수준의 지극히 미미한 변화가 초래되는 데 걸리는 시간조차 진화론적인 지구의 나이인 50억년을 훨씬 뛰어넘는 기간으로 계산됩니다. 이는 돌연변이 자체의 발생 빈도가 지극히 낮은데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20세기에 많은 유전학자들이 돌연변이 발생률을 증가시킴으로써, '진화를 가속화’시키려는 시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초파리에 X선이나 화학적 돌연변이원, 전리 방사선들을 가해 새로운 생물이 태어나기를 기대한 것이죠.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수십년간의 이와 유사한 연구들은 모두 실패로 끝났습니다. 관찰된 모든 돌연변이들은 생물체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했고, 설령 생존한 개체에서 나타난 돌연변이 중 향상된 돌연변이는 단 하나도 관찰되지 않았습니다.

요약하자면, 돌연변이는 발생 빈도 자체도 낮고, 복구하는 시스템도 존재하며, 설령 이마저 회피해서 돌연변이가 발생한다해도 생명체의 생존에 불리한 방향으로 작용하여 후대에 전해지기 어려움이 밝혀졌습니다. 즉, 생명체는 생존 메커니즘은 '변화’가 아닌 '보존’이며, 돌연변이에 의한 '변화’는 '진화’와 '생존’이 아닌 '도태’와 '소멸’을 야기함이 밝혀진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지금까지 '창조론’은 비과학이고, 종교적 신념이며, 허구의 산물이고, '진화론’은 과학이며, 합리적이며, '진실’이라고 생각하셨나요? 크나큰 착각입니다. 진화론은 '진화의 법칙’이 아닌, 어디까지나 진화’론’이자 일종의 학설에 불과합니다. 과학적으로 오류가 없다고 누구나 인정한 '만유 인력의 법칙’과 같은 확립된 자연 과학의 절대 법칙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점은 물론 '창조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창조론을 믿건 진화론을 믿건 여러분의 마음이지만, 어느 쪽이 과학적으로 과연 타당하고 합리적으로 이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지를 여러분의 믿음의 근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막연하게, 혹은 당연하게 진화론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셨다면, 여기에는 큰 문제점이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하고, 20세기에 비약적으로 발전한 현대 과학의 모든 객관적인 증거는 진화론의 종말을 고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창조냐 진화냐에 대한 논쟁 중 가장 큰 논란이 생명의 기원 및 진화론에 대해서 ‘간단하게’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외에도 지질학, 인류학, 화학을 포함한 거의 모든 과학의 분야에서 진화론과 창조론이 다양한 주제로 맞서고 있습니다. 이 모든 논란을 자세히 다루기에는 이 문서가 턱없이 부족합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 모든 다른 분야에 대한 논쟁도 과학적 사실과 발견이 나타남에 따라 과거에 진화론적, 무신론적 관점에서 주장했던 주장들이 근거가 없거나 현재는 객관적인 과학적 근거로 반박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발생학에 있어서 진화론적 분화의 절대적인 근거로 지지를 받았던 헤켈의 배아발생도는 인위적으로 조작한 사실이 드러났고, 유인원에서 인간으로 진화를 입증하기 위한 근거로 제시되었던 유인원의 화석들은 원숭이의 뼈였거나 멀리 떨어진 뼈들을 조합해서 조작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또한, 무신론자들은 너무나 정교하고 복잡한 상태가 유지되고 있는 우주와 지구의 각종 물리 상수를 '우연한 계기로 우연한 규칙성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근거로 설명하기가 확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주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다양한 종류의 우주’가 존재하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그 모든 조건이 딱 맞아 떨어진 우주일 것이라는 끼워 맞추기 식의 '다중 우주론’을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대한 논쟁과 21세기에 접어들어 밝혀진 최첨단 물리학적, 생물학적 지식은 우주와 생명 기원의 절대적인 필수 요소는 우연한 변화에 의한 끝없는 누적이 아닌 계획적인 지성임을 강력하게 반증하고 있습니다. 또한, 과학적 사실은 신의 존재와는 거리가 멀 것이라는 '무신론적 자연주의’관점에서 자신있게 과거에 제시되었던 수많은 가설들은 오히려 그들이 철썩같이 믿었던 '현대 과학’에 의해 반박되며, 날로 그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곰곰이 한 번 생각해봅시다.

돼지고기는 생명체가 아니니 억지스런 주장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어차피 여태까지의 모든 화학적 진화의 가설도 결국은 무생물에서 생물이 발생했다는 이론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암모니아와 메탄, 수소 가스에서 DNA와 아미노산이 생성되어 생명체가 될 가능성보다는 무수한 ‘완성된’ 단백질 분자와 DNA를 포함하고 있는 돼지고기에서 생명체가 발생하기가 훨씬 더 쉽지 않겠습니까?

'원시 상태의 화학 물질에 환경적인 조건이 갖추어져 기본 아미노산이 형성되고, 이들이 조합되어 단백질과 생명체의 구성 요소를 갖추고 진화하여 고등한 생명체가 되었다는 화학적 진화가설과 진화론은, 이렇게 원리만 놓고 본다면 얼핏 그럴싸해보입니다. 하지만, 실제적인 예를 들어 생각해보니 어떻습니까? 믿겨지십니까?

여러분은 정말로 바닷물고기가 먹고 사는 세포 하나로 구성된 플랑크톤과 같은 단세포 생물이 수십억년 동안 진화를 거듭하면 기쁨과 슬픔과 사랑과 증오를 느끼는 60조 개의 세포를 가진 인간으로 변했다는 사실을 정말로 믿으십니까? 직관적으로 정말로 확신하십니까? 감정과 영혼의 존재는 어떻게 설명하실 건가요?

여러분, 생물체의 세포하나는 인간이 발명해낸 그 어떤 복잡한 기계 장비보다도 정교하고 복잡하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런데, 이토록 정교한 세포가 셀 수 없이 많이 모여 정교한 시스템을 이루는 생명체가 어떻게 우연한 변화의 누적으로 생겨날 수 있을까요? 더군다나 그러한 변화의 원동력은 '발전’과 '생존’이 아닌 '도태’와 '사멸’의 방향으로 나타남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는데 말이죠.

이처럼 이 모든 기원에 대한 무수한 이론, 가설, 억측 중에 이 모든 객관적인 사실을 가장 완벽하고 가장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가설은 단 하나 밖에 없습니다. 막무가내식의 아무 근거도 없는 '종교적 믿음’이기 때문이 결코 아니라, 가장 '과학적’이며, 가장 '논리적’이며, 가장 '합리적’이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장 1절)'

18. 경험적인 증거들

지금까지는 성경과 하나님이 사실임을 지지하는 객관적인 증거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증거들은 주로 역사적, 과학적 증거들로 강력한 객관성을 지니고 있지만, 체험적인 증거는 되지 못합니다.

이 말은 앞서 언급한 '객관적인 증거’들이 불완전하거나 무의미하다는 얘기는 물론 아닙니다. 강력한 증거이긴 하지만, 나 자신이 직접 느낄 정도로 실감이 나는 증거는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이성적으로 이해한 상태에서 직접 경험까지 하면 비로소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실제적으로 강하게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공허한 철학이나 이론적인 검증이 아닌, 실제로 우리의 삶 가운데서 직접 체험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직접적이고 강력한 증거는 없겠지요?

이런 형태의 강력한 체험적인 증거는 성경이 기록된 시절 외에는 없는 것일까요?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 자신이나, 혹은 평범한 여러분 주위의 사람은 이런 강력한 체험적 증거을 할 수 없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은 성경이 기록되었던 시절과 동일하게 지금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이는 우리도 실제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설명드리기 앞서 우선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런 '체험적 증거’는 주관성이 강하고 해석에 있어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은 객관적인 증거보다는 '신뢰도’가 떨어질 수 밖에 없다는 한계성은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체험 증거가 객관적인 증거들이 나타내는 바를 동일하게 지지한다면, 체험적인 증거는 객관적인 증거를 보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실제 사실’로 강화하는데 강력한 버팀목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존재를 지지하는 '경험적인 증거’들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18.1. 삶의 변화

이런 증거들에는 크게 ‘삶의 변화, 인격의 변화’, ‘기도 응답’, '임사 체험’과 등이 있습니다.

첫 번째 증거인 '삶의 변화, 인격의 변화’와 같은 증거를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주변에서 가끔 폐인처럼 살다가, 어떤 사건을 계기로 '개과천선’을 해서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사람들을 직접 보거나, 그런 사람의 이야기를 접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연에는 분명히 어떤 계기가 존재합니다. 아무런 이유나 동기 없이 한 인생의 삶이 드라마틱하게 정반대로 바뀌는 경우는 없습니다.

여기에는 다양한 동기가 있습니다. 비참한 자신의 모습에 어느날 충격을 받아 각성을 하는 것도 하나의 동기이고, 특정한 사건을 통해 충격을 받아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주변 사람의 충고나 조언, 변함없는 신뢰와 사랑 같은 요소도 중요한 동기로 작용합니다.

그런데 이런 동기 중 대단히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던 사람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게 되면 자신의 인생관과 가치, 삶의 지향점이 송두리째 바뀌어서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알콜과 마약에 중독되었던 폐인이 중독에서 완전히 벗어나 건강한 삶을 살거나, 돈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자신의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선교사로 나가는 일도 있습니다. 최고의 사회적 지위와 학벌을 지닌 남부럽지 않던 엘리트가 모든 세상적인 가치를 포기하고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을 위해 헌신하는 사연도 있습니다.이런 일화는 너무나 많아서 제가 일일이 다 소개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여러분이 성경과 하나님에 대해 불신을 가지고 있거나 반신반의하신다면,

그런 간증이 어딨어? 있다고 해도 아주 드물게 있거나, 그것도 기독교인들끼리 다 조작한 것이지’

라는 의혹을 제기하는 분이 분명히 계시리라 확신합니다.

분명히 그런 식으로 조작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인정해야 할 사실은, 아무리 의심스런 관점에서 바라보아도 도무지 반박할 수 없이 진실된 간증도 아주 많다는 것입니다. 단지 내가 믿고 싶지 않기 때문에, 무수한 증거들을 아무런 근거없이 부정하는 것은 합리적인 태도가 아니지요.

굳이 제가 어떤 특별한 간증 케이스를 소개해드리지 않아도, 인터넷 검색에서 '기독교 간증’이라는 검색어로만 입력해도 어마어마하게 많은 수의 간증 케이스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무수한 간증들은 신적인 존재의 개입이 없이는 변화가 불가능한 정말로 드라마틱한 상황에서 변화가 일어났음을 동일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물론 '드라마틱한 삶과 인격의 변화’라는 증거는, '하나님’과 같은 신적인 존재의 개입이 없이 다른 요인에 의해서도 분명히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자체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증거로 100% 단정할 수는 분명히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님의 개입에 의해 삶의 변화가 일어났던 사람들의 케이스에서 국한하는 경우, 그들의 변화의 유일한 원동력이 하나님의 개입인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는 하나님의 존재가 아니고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시사하는 경험적인 증거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18.2. 기도 응답

두번째 증거로, ‘기도 응답’ 이라는 증거를 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는 분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면 만날 수 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일, 성경과 하나님이 진실이라면, 우리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셔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만일 기도 응답을 체험한 케이스가 전혀 없다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거나 성경은 거짓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소위 말하는 '기도 응답’이라는 것이 실제로 있는지 궁금하시죠?

실제 이런 케이스들 역시 ‘무수히 많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기독교 간증과도 겹치는 부분인데요, 하나님을 믿고 삶이 변화되는 과정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실제로 그러한 응답이 이루어지는 체험적인 일화 역시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물론, 이 '기도 응답’이라는 것 역시 '주관성’의 문제를 결코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냥 자연스러운 현상이나 자연적인 요소에 의해 이루어진 것을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해주셨다라고 착각하는 경우 역시 분명히 존재함을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류의 애매모호한 기도 응답 말고, 정말로 '신적인 존재’의 개입이 없이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기적적인 체험’이나 응답을 받았다는 케이스도 대단히 많다는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됩니다. 병원에서 치료를 완전히 포기한 상황의 말기 암환자가 순수하게 하나님만을 의지해서 기도로만 암이 완치되는 경우도 널려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빠른 단기간내에 말이지요.

이런 경우는 의학적 개입이라는 혼란 변수가 빠져있고, 아무리 생리적인 치유 메커니즘이 활성화되어도 의학적으로 단기간안에 암이 완전히 사라져버리는 일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신적인 존재의 개입이 없이는 설명될 수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체험적 증거’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종류의 애매모호한 증거까지 포함해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회의적인 시각으로도 신적인 존재의 개입이 없이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케이스들이 존재하고, 전세계에서 셀 수 없이 많을 정도로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한 두 케이스는 억지로 조작할 수 있지만, 무수히 많은 케이스들이 사실이 아님에도 모두 조작될 수학적 확률은 지극히 낮지요?

결론적으로, 신적인 개입에 의한 '초자연적인 기도 응답’이나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체험적인 증거는 분명히 하나님의 존재를 지지하는 증거로 이용될 수 있습니다.

18.3. 임사 체험

마지막 증거는, '임사 체험’과 같은 증거입니다. '임사 체험’은, 사람이 거의 죽음을 맞이할 무렵, 육체에서 영혼이 분리되어 '사후 세계’를 경험하는 체험입니다.

과거에는 이런 체험을 '신비주의’적이거나 '꿈’과 유사한 무의식적인 정신 활동 정도로 치부했으나, 임사체험에 대한 보고가 많아지면서, 의학적으로도 임사체험이라는 현상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접근하려는 시도가 나타났습니다.현재는 임사 체험이 의학 저널에서 다루어지기까지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육과 영혼이 분리되고, 최종적으로 하나님을 믿은 성도는 '천국’으로,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악하게 산 사람들은 '지옥’으로 던져진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실제로 이러한 사후 세계를 실제로 체험한 사람들이 대단히 많이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임사 체험’ 이라는 요소 역시, 주관성이 강하고 꿈을 착각한 것과 같은 경우도 있습니다.하지만, 이런 애매모호한 케이스를 제외하고, 꿈과는 완전히 구분되는 임사 체험을 한 경우도 매우 많습니다.

전반적으로 그들이 말하는 사후 세계의 전체적인 내용들은 세부적인 묘사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거의가 일치하고 이러한 묘사는 성경에 기록된 천국과 지옥의 모습과 동일합니다. 이에 따라, 임사 체험이라는 증거 역시 '천국과 지옥’의 존재를 지지하는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여러 임사 체험자들의 증언을 종합해서 공통적인 내용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에서 영혼이 분리된다

분리된 영혼은 지극히 빠른 속도로 육체를 벗어나 차원이 다른 어떤 세계로 이동한다

최종적으로 영혼이 도착하게 되는 곳은 극한의 빛과 아름다움, 영원한 행복으로 가득찬 세상(천국) 혹은, 그와 정 반대인 극한의 고통과 두려움, 영원한 좌절과 공포만이 가득한 세상(지옥) 둘 중의 하나이다.

천국과 지옥의 세부적인 묘사는 성경에 나와있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적어도 성경에 나와 있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묘사는 그들의 경험과 일치한다.

천국에는 열두개의 진주문, 투명할 정도 맑은 정금이 깔려 있으며,너무나 맑고 투명한 수정 바다, 지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과 광대한 자연, 하나님의 영광의 빛으로 가득하다. 천국은, 고통도 눈물도, 아픔도, 피로도 없는 극한의 행복의 장소이다.

지옥은 상상할 수 없이 뜨거운 유황불이 실제로 존재하며, 하나님을 부정하거나 자신의 욕망에 따라 산 사람들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끔직한 방법으로 끝없이 고문당하고, 불에 태워져도 결코 죽지 않으며, 지옥에서의 1초의 고통은 지상에서의 가장 강력한 고통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크다

천국과 지옥 체험을 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으며, 실제로 천국과 지옥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라는 명령을 받았다.

상충되는 정보를 제외한 이러한 여러 간증에서 공통적으로 일치되는 속성을 종합해보면, 천국과 지옥이라는 사후 세계는 '실제로 존재’하며, 이러한 사후 세계는 성경에서 언급한 천국과 지옥과 일치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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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 임사 처험은 거짓인가?

이러한 ‘환상’ 이나 ‘사후 체험’ 에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런 경험은 일종의 무의식이 강력하게 발현된 꿈이나 환상과도 같은 허상에 불과하지, 실재하는 세계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문제는, 이런 임사 체험은 '꿈’과는 분명히 다른 차원이 다른 체험이었다는 것입니다. 잠을 자는 상태에서 꾸는 꿈이 아닌, 자신이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육체와 영이 분리가 된 상태에서 생생하게 겪은 현상입니다. 어떤 사람은 지옥을 체험하고 나서 일주일 이상 두려움에 잠을 잘 수 없었고, 구역질로 밥조차 먹을 수 없었다고 증언하기도 합니다.

두 번째 문제는, 만일 이러한 사후 세계가 개인적인 무의식이나 상상의 산물이라면 사람마다 그 세계에 대한 묘사가 제각기 다르거나 다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세계의 많은 임사 체험자들의 경험은 놀라울 정도로 묘사가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랜덤한 꿈이 모두 우연히 일치할 수학적인 가능성은 지극히 낮지요.

세 번째 문제는, 이러한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한 사람들 중 '천국’과 '지옥’의 경험을 전파하기 위해, 생업까지 포기하고 전 인생을 건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 문제는, 이러한 증언의 수가 거짓으로 조작되었다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임사 체험은 사후 세계, 천국과 지옥의 실존을 지지하는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18.5. 증거와 믿음

결론적으로, 이와 같은 체험적 증거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실제로 체험할 수 있는 증거들이며, 지금도 여러분 주위의 신실한 사람들이 실제로 체험하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또한 하나님을 믿으면 이러한 증거를 직접 체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이성적으로는 이해하지만 직접 체험하지 못해서 못 믿겠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더이상의 끝없는 이성적인 논증이 아닌, 하나님을 마음으로 믿고 실제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저는 이미 충분히 하나님의 실존을 지지하는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증거들을 많이 제시했습니다. 철학적, 과학적, 수학적, 논리적, 역사적, 다른 사람의 간접적인 체험적인 증거들까지 포함해서 알려드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직접 경험하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고 생각하신다면, 방법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하나님께 그 분의 존재를 보여달라고 기도하면 됩니다.

재미있는 케이스를 하나 말씀드릴까요? 한국에 영광 제일 교회의 이기웅 목사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 목사님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크리스천을 핍박하는 불신자였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건을 계기로, 그 분은 하나님이 실존 여부를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진짜로 존재한다면, 자신에게 그 증거를 보여달라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분은 매일 밤 12시에, ‘하나님, 당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내게 당신의 증거를 보여주세요’ 라는 아주 짧은 기도를 100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했습니다. 그러던 중 97일 째, 초자연적인 환상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직접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이 분은 죄악된 생활을 청산하고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클릭)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이 방법은 사실 ‘우스운’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에게는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이라는 신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를 알고 싶었던 간절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도 있고,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자신의 존재를 여러분께 드러내주십니다.

나는 그래도 못믿겠어. 증거가 불충분해 .더 증거를 보여줘.

라고 끝없는 증거의 증거를 요구하는 분은, 사실은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의식적으로 믿기를 거부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믿어서 포기해야 할 인생의 쾌락이 너무나 아깝기 때문이지요.

지금까지 이토록 많은 증거를 보여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그래도 못믿겠다는 마음이 남아 있으시다면, 여러분이게 지금 필요한 것은 더이상의 이성적이고 추가적인 증거가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간절한 기도입니다.

하나님, 정말로 저는 하나님이 있는지 확인하고 믿고 싶습니다. 저의 마음에 있는 마지막 의심을 깨주시고, 하나님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내게 당신의 존재를 알려주세요.

19.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모순

지금까지 왜 성경과 복음이 단순한 '종교적 허상’이 아닌 역사적, 과학적 '진실’인지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하지만 설령 여러분이 이러한 검증과정에 동의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의문은 남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만일 정말로 하나님이라는 신이 존재하고 그 분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수많은 사람을 지옥에서 고문할 수 있는가?

애초부터 하나님이 죄를 만들지 않았다면 이런 골치 아픈 문제가 없지 않았겠는가?’

왜 하나님은 세상의 수많은 고통과 부조리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해결하지 않는가?

어찌보면, 이 모든 속성이 공의와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속성과 완전히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고, 하나님은 사랑보다는 고문과 고통을 좋아하는 잔인한 신인 것 같아보입니다. 이 세 가지 질문은 서로 다른 질문 같아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모순되어 보이는 내용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알면 의외로 쉽게 풀립니다. 그럼 지금부터 이 난제를 풀어보겠습니다.

19.1. 하나님은 '자유 의지’를 주셨다.

여러분이 기계적인 '인사 로봇’과 인격이 있는 ‘아기’ 중 어느 것을 더 좋아하십니까?

'인사 로봇’이 단 한번의 예외도 없이 여러분에게 예의바르게 인사하더라도 여러분은 아무런 감동도 받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매일 울고 장난도 치지만, 가끔씩 웃으면서 '아빠’를 부르며 기어오는 아기에게 여러분이 사랑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아기는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고, 로봇은 자유 의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로봇은 원래 그렇게 하도록 '설계’가 된 것이기 때문에 로봇이 아무리 열심히 인사를 해도 여러분이 기분이 좋을 이유가 없고, 아무리 심한 욕을 해도 여러분이 화가 날 이유가 없는 것이죠. 하지만, 자유 의지를 가진 아기는, 아빠를 거부할 수 있는 '의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빠에게 달려가서 안기기 때문에 아빠는 사랑과 감동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얼마든지 '자유 의지’를 박탈한 채로 기계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존재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죄를 결코 짓지 않고 기계적으로 선한 일만 하거나 하나님을 그 어떤 상황에도 찬양하면서 악을 행치 않는 감정과 인격이 없는’기계’로 얼마든지 만들 수가 있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그런 존재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아무 의미 없는 경배를 받기 원하지 않으시고, 마치 우리처럼, 하나님을 얼마든지 부인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찾고, 경배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19.2. 자유 의지의 산물 - ‘선과 악’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왜 하나님은 '악’을 창조했느냐라고…

하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하나님께서는 '악’을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악’이 존재할 '가능성’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에서 일방적으로 악을 행하도록 '설계’하지 않았고, 항상 선과 악중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길에서 강도를 당해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 것을 보았다고 가정합시다. 여러분은 여러분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 사람을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도록 선행을 베풀 수 있습니다. 반면, 내 일이 아니라고 그냥 무시하고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드물지만, 심지어는 피를 흘리는 이 사람의 지갑을 훔쳐 도망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누구도, 심지어는 하나님마저도, 특정한 선택을 여러분에게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여러분의 선택에 달린 문제이죠. 하지만, 이러한 '자유 의지’의 결과로 인해 필연적으로 '선’과 '악’이 구분될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선과 악은 인간의 자유 의지와 그에 따른 선택의 산물입니다. 선과 악은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선과 악은 상대적인 개념이고, 비교 대상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왜 악이 없이 선만 만들면 되지 않느냐라고 반문하는 것은 논리적인 모순입니다.

따라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 누구도 이 자유 의지의 산물인 '악’이라는 것을 결코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악’을 강요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모든 의사 결정권을 완전히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이런 생각을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살인을 저지르지도 않았고, 사기를 치지도 않았으며, 도둑질도 하지 않았고, 경범죄로 경찰서에 끌려간 적도 없는 양심적인 시민인데 대체 내가 무슨 악을 저질렀다는 것이냐’ 라고 말이죠.

하지만,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죄와 악의 개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엄격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사람를 미워하는 마음만 가지고 있어도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고,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기만 해도 죄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 어떤 성자라도 악을 행하지 않았다고 결코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19.3. 죄의 삯은 사망, 사망 이후의 심판

인간의 '악’의 산물은 '죄’를 짓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성경에서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짓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에 결국 모든 사람은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죽음이 끝이 아니고 다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죽음 이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심판의 대상은 사람이 살면서 지은 '행위’입니다.

그런데, 그 어떤 사람도 '죄’를 피해갈 수는 없기 때문에 결국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결코 피할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영원한 지옥 형벌입니다.

19.4. 하나님의 속성 - 공의와 사랑

하나님의 속성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공의’롭다는 것이고, 하나는 '사랑’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록, 융통성을 발휘할 수 없을 정도록 완벽하게 공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너무나 하찮고 대수롭게 생각하는 시시한 죄 조차도 그분은 결코 용납을 하시지 못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죄에 대한 형벌을 내릴 수 밖에 없는데,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영원한 형벌인 지옥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사람들이 많이 오해를 합니다.

아니 무슨 신이 그렇게 아량이 없나? 신이 공의로운 것은 알겠는데, 사랑도 무한하다고 하면 그냥 사랑을 베풀어서 죄를 용서해 주면 간단하게 문제가 해결되는 것 아닌가?

사실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공의와 사랑은 논리적으로 절대로 어중간하게 타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아기를 너무나 사랑한다면, 인위적인 낙태를 지독하게 미워하는 것이 정상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아이를 너무나 사랑한다면, 여러분의 아이를 살해한 살인범을 지독하게 미워하는 것이 정상일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랑의 정도가 더 크면 클수록, 살인범에 대한 증오의 정도도 더 커질 것이고,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의 아이에 대한 사랑이 무한대라면, 살인범과 그의 살인죄에 대한 증오도 무한대일 것입니다.

이 때, 여러분의 아이의 살인 사건의 판결을 맡은 판사가 공의롭지만, 동시에 사랑도 넘치는 사람이라고 가정해봅시다. 판사가 법정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공의로운 판사이기 때문에, 이 살인범의 죄를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사랑이 넘치기 때문에 이 죄를 용서하고 무죄 판결을 내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인정할 수 있습니까? 결코 인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공의롭기 때문에, 너무나 죄를 미워하기 때문에, 이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대충 무마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실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 합니다. 공의와 사랑은 논리적으로 결코 양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는 어떨까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무한대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소하더라도 결코 인간의 죄를 용납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누군가는 죄값을 어떤 방식으로든지 치르고 해결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의 본성으로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고, 결국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이 죄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이런 죄를 지을 가능성 자체를 알고 있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저지른 죄악을 담당하실 이유가 전혀 없고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을 공의롭게 판결내려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친히 인간의 죄악을 직접 담당하신 것입니다.

전지 전능하신 신이 자신이 만든 보잘것 없는 피조물의 몸으로 오셔서, 피조물에게 욕설과 비난, 채찍질, 굴욕, 고문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이로써, 인간의 죄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고, 인간은 죄로 인해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천국에 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재판장이신 하나님은 여러분의 아이를 잔인하게 살해한 살인자에게,

나는 피도 공의롭기 때문에 그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당신에게 유죄 판결과 사형을 면하게 할 수 없소. 당신은 무조건 ‘사형’!’ 이라고 판결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공의롭지만, 동시에 사랑도 넘치기 때문에 이번 한 번만은 살인자를 용서해 주겠습니다’라고 억지같은 편법을 쓰지도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방식은 이것입니다.

'저는 너무나 공의로운 판사이기 때문에 결코 이 사람의 죄악을 그대로 묵과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이 한 순간의 실수로 소중한 자신의 생명을 희생당하는 것도 결코 원치 않습니다.

보호자께서는 이해가 안가시겠지만, 제가 이 살인자의 죄를 대신 지겠습니다. 저는 아무 죄가 없지만, 이 살인자의 죄를 제가 대신 지겠습니다. 저를 몽둥이로 죽을 때까지 때리시든, 제 재산을 빼앗건, 분이 풀릴 때까지 침 뱉고 욕설을 하건 마음대로 하십시오. 차라리 제가 죄값을 대신 치를테니 이 사람은 용서하고 살려주십시오’

여러분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여러분은 그 살인자 대신 공의롭고 사랑이 넘치는 판사에게 미친듯이 분풀이를 하는 조건으로 살인범을 용서했습니다. 살인범은 석방되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살인범이 여러분의 부모님까지 또 죽였습니다. 같은 재판과 같은 상황이 또 반복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살인범을 용서할 수 있습니까? 판사의 제안에 또 따르시겠습니까? 절대 다수는 한 번은 용납하지만 그 이후로는 결코 용납하지 못한다고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여러분이 이 판사의 눈물겨운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또 동일한 방법으로 살인범을 처리했습니다. 말도 안되는 가정이지만, 이런 과정이 셀 수 없이 많이 반복되었고, 판사는 그 때마다 자신이 죄값을 받겠다고 하며 눈물로 부탁을 했습니다. 판사는 몸이 찢어지도록 여러분에게 구타를 당하며 죄값을 대신 치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방법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무수한 죄를 짓고, 또 짓고 짓습니다. 만일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이었다면 용서를 할 수 있었을까요? 설령 한 두번은 ‘내가 대신 죄값을 치르고 용서할테니 다시는 죄짓지 말아라. 그래도 지으면 넌 진짜 지옥이다.’ 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임을 아시기 때문에 매일 죄를 짓고 또 지어도 회개하고 돌이키면 또 속아주시고 바보같이 또 죄를 짊어주십니다. 이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그런데, 만일 이 재판관이 반복적인 살인범에 대한 죄를 무한대로 대신 짊어질 수 있을까요? 이 사랑이 넘치는 재판관은 자신이 죄값을 치르는 대신 이 흉악한 살인마에게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새사람이 될 것을 부탁했습니다. 살인범은 그 때마다 눈물로 참회를 하고 새 사람이 되겠다고 했지만, 항상 그 죄를 반복하며 지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때마다 그 재판관은 자신이 죄값을 대신 치러주었습니다. 또한, 회개를 전제로 죄값을 대신 치러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렇게 상식적으로 상상할 수조차 없는 엄청난 사랑을 재판관이 베풀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살인범이 끝까지 뉘우치치 않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때도 재판관이 이 사람에게 무죄 판결을 내릴 수 있을까요? 결코 아닐 것입니다. 이는 재판장의 공의로운 속성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런 살인범을 본다면 분노가 극에 달해서, 저렇게 무한한 자비를 베푸는데도 끝까지 뉘우치치 않는 저 인간은 그 어떤 잔인한 방법으로 사형받아도 마땅하다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입장을 바꿔볼까요?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끝없이 죄를 짓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단지 우리는 인정하기 싫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짓도록 결코 강요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죄와 악은 우리가 선택해서 지었을 뿐이고, 그에 대한 죽음과 심판의 결과는 우리가 져야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져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죽음과 지옥의 고통을 우리 대신 그분이 친히 져주셨고, 너희를 지옥에 보내지 않을테니 대신 회개하고 앞으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 죄를 짓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눈물고 회개하기만 하면 그 때마다 대신 죄를 져주시고 우리를 용서하시겠다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수준의 사랑을 베풀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회개하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지옥의 형벌을 피할 길이 완전히 열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예수님을 부인하다가 지옥에간다면, 이게 과연 불공평한 일일까요? 맞습니다. 사실 너무나 불공평한 일이기는 합니다. 다만 범죄자인 우리쪽에 너무나 유리할 정도로 불공평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지만, 너무나 사랑이 넘치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분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고,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더군다나 그 방법은 자신에게는 너무나 굴욕적이고도 치욕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이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예수 안믿고 회개 안한다고 인간을 지옥에 보낼 수 있어?'라는 질문을 하시나요? 이는 ‘아니 내가 몇 사람 몇 명을 죽였기로서니, 그토록 사랑이 넘치는 재판장님이 어떻게 이 정도 죄를 대충 용서 못하실 수 있습니까?’ 라고 따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 재판장은 아무리 흉악한 죄를 아무리 자주 지어도, 회개하고 새 삶을 산다면 자신이 그 모든 무시무시한 죄값을 달게 받겠다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사랑을 베푼다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사람이 아닙니까? 어떻게 더 이상의 사랑을 기대할 수 있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그래도 끝까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하면서도, '죄값’은 면제받기를 원한다면, 이는 논리적으로 결코 불가능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로운 속성과 사랑이라는 속성이 '죄값’을 치르는 과정이 없이는 결코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지옥에 간다면, 이는 결코 하나님의 사랑 부족이 아닌 전적으로 여러분의 선택 때문인 것입니다.

19.5. 너무나 불공평해 보이는 세상

우리는 살면서 세상이 너무나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부모를 통해 풍족한 재산, 학벌, 지위, 외모, 권력을 고스란이 물려받아 풍족하고 행복한 삶을 누립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극심한 가난과 질병, 신체적인 약점을 안고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갑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살아가도 너무나 인생을 풍족하게 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직하고 선하게 살면서도 불행하게 사는 사람도 너무나 많습니다. 신이 있다면 어떻게 이것을 공평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정말로 존재하고 그 분이 정말로 공의롭다면 어떻게 이런 불합리와 모순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간과하는 것이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삶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세상의 삶은 영원한 천국이나 지옥, 즉 영원의 삶에 비하면 한낱 순간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만일, 이 세상의 삶이 전부이고 모든 것이 끝이라면, 이 세상은 지극히 불공평한 세상일 것입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악인이 득세하고 형통할 수 있습니다. 사기치고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100살까지 행복하게 얼마든지 장수할 수 있습니다. 너무나 선하고 정직하게 살면서도 불운하게 단명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 결코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삶에 대한 상급은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모든 말과 행동이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심는대로 거둔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심각한 착각은 이 세상에서 심는 것을 반드시 이 세상 중에 거두어야 된다는 생각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보상의 개념은, 이 땅에서 심는 우리의 행위에 대한 합당한 판결은 죽고 난 이후의 심판대에서 ‘공정하게’ 받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온갖 악을 행하면서도 세상적인 복을 다 누리는 사람은 일시적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지만, 결국 사후의 심판에서 모든 죄값을 치르게 될 것입니다. 너무나 선하게 하나님을 따르며 살았지만 온갖 고통 속에서 힘들게 산사람도 결국 사후에 천국에서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세상적인 부와 풍요를 누리며 사는 사람은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그들이 받을 복은 이미 세상에서 다 누렸고, 만일 그들이 자신의 세상적인 풍요에 취해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반면 세상에서 버림받고 비참하게 학대받으면 사는 사람들은 세상적으로는 실패한 인생이지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만나서 그분만을 의지하며 천국가는 삶을 소망할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조금 부유하거나 가난하다고, 혹은 조건이 조금 좋고 나쁘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상적인 좋은 조건은 영생에는 불리한 조건이고, 세상적인 악조건은 영생에는 좋은 조건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모든 인간은 언제나 공평합니다. 악인과 죄인은 반드시 심판대에서 죄값을 치르고 의인은 천국의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20. 결정하셨습니까?

지금까지 오랫동안 왜 여러분이 막연하게 허황되게 보이는 성경과 복음이 거짓이 아닌 확실한 근거가 있는 '진실’인지에 해 살펴보았습니다. 여기까지 보신 분 중에는 정말 성경이 믿을만하다고 생각하실 분도 계실 것이고, 아직도 의심이 남아 있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길고 자세하게 살펴 본 것 같지만, 사실 성경의 사실성과 진실성을 지지하는 고고학적, 역사적, 과학적, 철학적 증거는 너무나 많고, 제가 소개한 부분은 정말로 지극히 작은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이 혹시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 더 많이 남아 있고, 모든 의문과 여러분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해답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못 믿겠다고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제가 아무리 많은 근거를 제시해도 여러분은 결코 믿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많은 합리적인 근거와 증거, 설명을 해도 결국은 '믿음’의 문제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막연하게 성경과 복음은 믿을 만한 합리적인 근거가 없다는 생각이 큰 오류이며,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성경은 충분히 합리적으로 믿을 만한 근거가 충분합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설명드렸던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해보겠습니다.

20.1. 비상식적이고 초자연적인 기적, 과연 가능한가

과학적 법칙은 그 법칙과 관련이 있는 '자연적인 조건’이 불변하고, 신과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의 개입이 없다는 전제를 '암묵적’으로 깔고 있다. 그런데, 사실 이 전제는 항상 참이라고 보장할 방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참’이라고 가정한다.

따라서, 자연법칙에 위배된다고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현상이 없다는 주장은 전제가 항상 참이라는 가정을 해결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결론이 옳다고 주장하는 '논리적인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비과학적이기 때문에 기적은 없고, 신은 없다는 주장은 '논리적 오류’이며,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신적인 존재의 가능성은 결코 부정할 수 없다.

20.2. 성경의 본질과 역사성에 대한 의문

성경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로서, 종교학적이거나 신학적인 관점에서 확증된 것이 아니라, 고고학적, 문서학적인 관점에서 가장 정확하고 역사의 기록임이 '객관적’으로 입증되었다.

고서 검증법에 의하면 성경은 그 어떤 동서양의 고대문서보다도 정확하며, 오류가 없음이 증명되었고 2000년이 넘도록 정확하게 보존되어 온 ‘유일한’ 문서이다. 성경은 그 어떤 기타 종교의 경전보다 역사적 사실에 확실한 바탕을 두고 정확하게 기록된 ‘고고학적’ 증거를 가지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실을 증거하는 고고학적은 증거가 무수히 많이 발견되었고, 성경 뿐만 아니라 당시에 쓰여진 기타 문서에서도 성경의 인물과 사건이 참이었음을 그대로 증거하는 수많은 고대 문서들이 발견되어 성경의 역사적 사실성을 입증해주고 있다.

성경은 1500년이 넘는 기간동안 60명이 넘는 서로 다른 저자에 의해 기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치의 오류도 없이 완전무결한 통일성을 갖추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무수한 예언들은 역사 속에서 그대로 성취되었다. 심지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정세와 상황도 너무나 정확하게 맞추고 있으며, 앞으로 진행될 인류 역사의 흐름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20.3. 생명의 기원과 진화에 관한 비과학성

원시 대기를 재료로 전기적인 자극이 가해져 우연히 생명체의 구성성분인 아미노산이 형성되었고, 이들이 조합되어 원시적인 생명체가 출현했다. 이들이 끝없는 진화를 통해 각종 생물이 나타났고 사람도 이러한 진화 과정의 산물이다.

천문학과 물리학, 생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이전인 19세기에 확립된 유물론적, 진화론적 사고에 바탕을 둔 자연과학의 신조는, 20세기의 눈부신 과학의 발전에 의해 거짓이었음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다.

20세기 중반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한 화학, 유전학과 세포 생물학적인 지식은 우연히 화합물이 합성되어 생명체의 원형이 탄생하고 누적된 돌연변이에 의해 진화와 각종 생물로의 분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19세기의 진화론적인 추측이 완전히 잘못되었음을 입증했다.

돌연변이의 누적은 진화와 발전이 아니라 퇴보와 사멸을 가져오며, 생명체의 기본 생존 메커니즘은 돌연변이에 의한 유전정보의 발달이 아닌 유전자의 보존임이 밝혀졌다.

20.4.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모순

하나님은 결코 '죄’와 '악’의 창시자가 아니며, 죄와 악은 인간에게 부여된 '자유 의지’에 따른 선택의 결과일 뿐이다. 죄의 삯은 심판과 영원한 형벌이므로 그 누구도 이 끔찍한 결과를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이 직접 인간의 모든 죄값을 십자가에서 치르심으로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할 길을 열어놓으셨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살길을 열어놓으셨고, 돌이킬 기회를 끊임없이 주심에도 불구하고 죄에서 떠나지 않고 하나님을 부인하다가 받게 되는 영원한 형벌은 전적으로 '인간의 책임’이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난니 그러브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로마서 1:20)

20.5. 충분한 근거

여러분은 믿을 근거가 부족하다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합리적인 근거는 충분합니다. 아니 충분한 수준을 넘어서 차고도 넘칩니다. 여러분, 성경과 예수님, 복음은 단순히 인간이 꾸며낸 교리나 종교 철학이 아닙니다. '역사적 사실’이며 진실입니다.

종교라는 개념을 단순히 어떤 사람이 자신의 도덕적인 철학이나 규율을 체계화하여 인간에게 정신적인 평안과 위안을 제공하기 위해 정립한 사상 쳬계라고 정의한다면, 모든 종교는 나름대로 다 의미가 있습니다.

불교도 나름대로 철학과 사상이 있고, 힌두교도, 이슬람교도, 어떤 종교건 다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종교에도 사랑이 있고, 자비가 있으며, 절제와 겸손, 희생이 있습니다.신이라는 존재도 해당 종교의 사상 체계를 뒷받침하기 위해 인간이 꾸며낸 '가공의 산물이라면, 우리는 특정한 신만이 진리라고 결코 주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진리’라는 것을 단순히 '사람이 합리적으로 생각해서 만들 수 있는 것’으로 정의한다면, 모든 종교는 다 진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종교는 다 나름대로 타당한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진리는 결코 편협하거나 배타적이지 않을 것입니다. 포용적이고 관용적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진리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진리인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실이라는 객관적인 증거와 근거가 있어야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아무리 1+1이 3이라고 생각한들 1+1= 2라는 편협하고 배타적인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진리는 배타적입니다.

A라는 종교에서 a라는 신이 우주를 창조했고, a라는 신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B라는 종교에서는 b라는 신이 우주를 창조했고, b라는 신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이 모두를 진리로 받아들여야 합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진리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것이 진실이라는 '객관적’인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는 '종교’의 한 가지라고 하지만, 사실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꾸며낸 신화가 결코 아닌 역사적인 진실이고, 이것이 분명히 증명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차이입니다.

창조주를 이야기하고, 동정녀 탄생을 이야기 하며, 사도에 의한 기적과 신화적인 일들을 주장하는 종교는 무수히 많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종교도 그러한 내용이 분명한 역사적 사실임이 증명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수많은 종교에서 기적과 믿기 힘든 초자연적인 일들, 내세를 이야기 하지만, 우리가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적인 근거를 제시한 종교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단지 그냥 이렇다라고 주장만 할 뿐입니다. 복음은 너무나 명백한 ‘역사적, 과학적, 철학적, 현실적’ 근거가 있습니다. 이것이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이것이 왜 복음과 기독교가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홀로 독선적으로 자기만이 옳다고 주장하는지에 대한 이유입니다. 다른 모든 종교에서 자신의 신이 실제로 존재하고 참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면, 그에 대한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종교의 경전이 조작되거나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닌지에 대한 역사적인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정말 그 신이 허구의 산물이 아닌 '실제로 존재하는 전지전증한 존재’라면, 단순히 종교 경전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전지전능함이 나타난 실제적인 역사적인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복음이 일견에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가고 믿기지 않기 때문에 다른 기타 종교의 종교 철학과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입니다. 복음에는 너무나 분명한 '역사적인, 과학적, 철학적 증거’가 있습니다. 그래서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결정해야 합니다. 복음은 결코 근거없는 낭설이 아닙니다. 모든 종교는 다 똑같고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는 생각은, 종교라는 것을 단순히 사람이 만들어 내고 창조한 철학으로 정의할 때만 맞는 말입니다. 복음은 역사적 진실이자 명백한 사실입니다.

나는 지옥 보낸다는 신이 기분 나빠서 믿지 않겠다

혹은 ‘나를 천국 보내준다니까 믿어 볼란다’

다른 종교에도 내세가 있다고 하는데 나는 그 쪽 교리가 끌리니까 그 종교를 믿어볼란다

종교라는 것이 그냥 인간이 아무 근거 없이 만들어낸 사상체계라면 이런 식으로 백화점에서 쇼핑하듯이 자신에게 맞는 것을 마음대로 고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다릅니다. 저도 믿지 않으면 지옥에 보낸다는 복음이 솔직히 싫습니다. 하지만, 제가 복음을 믿는 이유는 그것이 객관적으로 부인할 수 없는 너무나 명확한 근거가 있기 때문에,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복음이 거부감이 들고 기분 나쁘고 여러분이 받아들이기 힘드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기분나쁘다고 믿지 않겠다는 것은 합리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근거는 나의 '기호’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사실’이나 아니냐의 여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복음을 받아들일지 거부할지에 대한 근거는 너무나 충분합니다. 결코 이 문제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지금 설령 믿지 못하시겠다 하더라도 결고 그냥 넘기지는 마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의 선택의 결과는 영원한 기쁨이냐 영원한 고통이냐를 결정하는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마지막 시간입니다. 결정의 시간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부정할 수 없는 수많은 증거는 예수님과 복음만이 참 진리임을 강력하게 증거합니다. 예수님을 참 구주로 믿고 새 삶을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는지 다음 글에서 살펴보겠습니다.

21. 구원의 길

여러분이 이제 성경과 복음이 단순히 사람이 꾸며낸 종교적 판타지가 아닌, 분명한 진실임을 아셨다면, 이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일만 남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은 아주 쉽고 단순하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나 힘들고 치열한 싸움이기도 합니다. 또한, 구원에 대한 너무나 잘못된 인식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올바로 믿지 못하고 지옥으로 달려가는 크리스천들도 아주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이제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하셨으면 올바른 구원의 길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올바른 구원에는 4 단계가 있습니다 (믿음 - 죄사함 - 거듭남 - 의의 행실)

21.1. 믿음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할까요?

첫째로, 창조주 하나님이 존재하고, 살아서 역사하시며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고, 정죄에 이르지 아니할 것이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느니라 (요한복음 5:24)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을 나타내셨느니라.(로마서 5:8)

둘째,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으며, 십자가에서 흘린 그의 피로써 우리의 모든 죄가 깨끗이 씻어져 죄들이 용서받는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셋째, 오직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21.2. 회개를 통한 죄사함

일단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었으면, 그 다음에는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죄에는 원죄와 자범죄가 있습니다. 원죄는 아담과 하와가 최초로 지은 죄가 유전되어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죄이고, 자범죄는 스스로 지은 죄입니다. 아무리 의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도 하나님 앞에 서면 죄인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마 이 글을 보시는 분들 중 대부분은 자신이 특별히 중한 범죄를 저지른 적도 없고, 경찰서나 교도소에 가본 적도 없는 양심적인 소시민인데 대체 왜 성경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하는지 이해를 못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일반적인 사회 규범이나 법, 도덕의 기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격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지 않고, 마음으로 미워하며, 함부로 판단하고, 용서하지 않는 것도 죄라고 합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거나, 심지어는 선을 알고도 행치 않는 것도 죄라고 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기만 해도 간음한 것이고,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기만 해도 살인을 저지른 것과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마음과 혼과 생각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이를 지키지 못해도 죄가 됩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사회에서는 살인이나 강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양심적이고 깨끗한 시민일지 몰라도 이렇게 하나님의 법앞에서는 끔찍한 범죄자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 어떤 성인 군자도 죄인이 아니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기록된 바와 같이 "의인은 없나니 없도다, 한 사람도 없도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도다. 모두가 길에서 벗어나 함께 쓸모 없게 되었으며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없도다. 한 사람도 없도다 (로마서 3:10 ~12)

이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다가 (로마서 3:23)

그러므로 선을 행할 줄 알면서도 행치 아니하는 자에게는 그것이 그 사람에게 죄가 되느니라 (야고보서 4:17)

죄사함이란 나의 원죄와 과거에 지은 자범죄에 대해 하나님께 완전히 용서받는 것을 말합니다.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내가 지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써 내 모든 죄가 깨끗이 씻겨진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회개란 단순히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는 개념이 아니라, 자신의 죄와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하나님 앞에서 드러내 놓고 용서를 구하고, 행동까지 고치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여러분이 처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할 때에는, 여러분이 죄인일 수 밖에 없음을 고백하고,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을 믿으며, 예수님 뜻대로 살겠다는 결단을 우선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해도 사람에게는 죄의 본성이 남아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또 죄를 짓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가 예수님을 먼저 나의 구주로 영접한 이후에도 짓는 자범죄에 대해서는 죄를 지을 때마다 애통하는 마음으로 회개하고, 다시는 죄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그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죄의 유혹에 거듭해서 쓰러져 죄가 반복될 지라도 하나님은 회개만 하면 끝까지 용서해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반복해서 짓는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회개할 면목이 없다고 자기 자신을 정죄해서는 안됩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회개만 하면 계속 용서해 주시니까 마음대로 죄를 편하게 짓고, 그냥 입으로만 반복적으로 회개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으로 가짜 회개입니다. 회개는 죄를 짓기 위한 면죄부가 결코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는 설령 나중에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다시 그 죄를 반복할 지언정, 그 죄를 지은 것을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뉘우치고 다시는 짓지 않겠다는 강한 결단과 실천이 뒤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악에서 떠나 선을 지향하는 것이며, 자기 중심적인 삶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삶으로 돌이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21.3. 거듭남

예수님을 믿고, 회개를 통한 죄사함을 받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이자 내 삶의 주인으로 영접하면 이제부터는 여러분은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됩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에서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 완전히 신분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쾌락과, 욕망, 이기적인 자아 실현을 목표로 하는 삶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사는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21.4. 성화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아 거듭났다고 이후에는 죄를 전혀 안짓는 완전 무결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거듭났다고 해도 인간의 죄의 본성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회개하고 거듭나도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수많은 죄의 유혹에 시달리고, 때로는 넘어지고, 다시 범죄하고 낙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때마다 낙심하지 말고 다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죄사함은 결코 우리의 의로운 행위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후에 의로운 행위가 필요없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거듭난 사람은 '의인’으로 신분이 바뀌었기 때문에 의롭게 살아야 할 의무가 생기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욕심과 이기심, 탐심, 돈에 대한 욕심을 모두 버리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정결하고 깨끗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과정을 '성화’라고 합니다. 이 길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들어가는 문도 좁을 뿐더러 들어간 이후의 길도 협착하기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은 단순히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지적으로 동의’하는 수준에 그치고, 이러한 성화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으면 결코 갈 수 없습니다.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에서 너무나 잘못된 복음이 전파되고 있습니다. 단순히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기만 하면, 구원과 천국은 보장된 것이고, 의로운 행실은 '상급’의 문제로 치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룩한 삶과 성화의 과정을 강조하면,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행위 구원론이라는 이단 사상이라고 몰아부칩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믿음과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지만, 그 믿음이 '행함과 성령의 거룩한 열매’로 증명되지 않으면 가짜 믿음입니다.

즉, 의로운 행실이 없이 머리로만, 마음으로만 믿으면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행위’가 없어서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믿음이 의로운 행위로 증명되지 않은, 가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행함과 믿음은 상식적으로도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어떤 남자가 자신의 아내를 마음으로, 입으로는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매일 폭력을 행사하고 외도를 한다면 어떻게 이 남자가 아내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거룩하게 된 사람이 어떻게 남을 시기하고 미워하고 질투하고, 돈을 사랑하고, 간음하고 세상과 벗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정말 확실하게 믿는다고 하지만, 삶에는 온갖 악독과 불경건함이 가득하다면 결코 구원받지 못합니다. 바로 지옥입니다. 그 이유는, 선한 '행위’가 없어서가 아니라, 오직 구원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만 받지만, 그 믿음이 거룩함으로 증명되지 않는 가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성화의 과정, 즉 지속적인 회개와 거룩한 열매맺음이 동반되지 '믿음’은 가짜 믿음입니다. 따라서, 이런 믿음으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 받고, 거듭난 성도는 이처럼 세상에 사는 동안 끝까지 정결한 삶과 거룩한 열매를 맺으면서 살아가야 할 의무가 생깁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나를 구원해 줄 구세주로만 생각하지, 나의 삶의 주인인 '주님’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단순한 구세주가 아닌, 나의 삶의 ‘주인’ 으로 모시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의 목표와 가치관, 말과 행동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송두리째 바뀌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은 결코 만만하고 쉬운 길이 아닙니다. 우리의 욕심을 포기하고, 자아를 죽여야만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 길이 비록 힘들지라도 이 길을 가기로 작정하는 사람에게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능히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도와주시며 그 길을 평탄케 한다는 사실도 반드시 믿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렇게 어려운 거라면 차라리 안 믿겠다고.하지만, 어렵고 힘들다는 것이 결코 불신앙의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쉽고 편하고 나에게 도움이 되다는 것도 믿음의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의 근거는 오직 이 복음이 '사실이냐 거짓이냐’가 되어야 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도 이 복음이라는 것이 때로는 부담스럽고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 복음을 믿는 이유는 지금까지 알아본 것처럼, 복음이 '진실’이고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피곤하고 까탈스러운 복음에 얽매일 이유가 전혀 없지 않습니까?

죽음 뒤에 심판이 없고,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면, 우리는 한 번 밖에 없는 이 인생, 세상에서 하고 싶은 것 마음껏 하고, 누리고 싶은 것 마음껏 누리다가 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문제는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는 결정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단순히 죽음 뒤에 심판이 있다고, 예수 안 믿으면 지옥간다고, 기독교에서는 자기네들만 맞다고 떠들어대니까 기분 나빠서 안믿겠다는 것은 결코 불신앙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이 복음이 비록 불편하기는 하지만, ‘진실이냐’ 아니면, 거짓이냐만이 중요할 뿐입니다. 성경의 말씀과 복음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이미 앞서 너무나 자세히 살펴보았고, 여러분이 받아들일 이유는 충분합니다.

여러분, 힘들고 여러운 일이 있습니까? 왜 살아야 하는지, 인생의 의미가 대체 무엇인지 고민이 되십니까? 예수님은 지금도 문 밖에 서서 여러분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무한한 사랑으로 여러분의 삶의 주인이 되시어 여러분을 영원한 천국과 기쁨의 세계로 함께하시길 원하고 계십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고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렵지만, 그 좁은 길을 기꺼이 가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손으로 도와주시고 인도하십니다. 여러분의 모든 아픔과 세상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예수님을 구주로, 또 여러분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구원받으시기 바랍니다.

22. 전직깡패 박영문씨의 실화

박영문씨는 젊은 시절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험한 인생을 살던 깡패였습니다.

가정 불화로 아내가 떠나게 되자 복수심에 불타 일가족을 몰살시키려는 무서운 계획을 세우던 중 놀라운 경험을 하고 극적으로 회심하게 됩니다.

1986 년 4월 3일은 내 일생을 변화시켰던 일이 있었던 날이다.

1985년 술에 취해 오토바이 사고를 내고 구치소에 갇혔다가 풀려난 내게 아내는 이혼요구를 했고 나는 아내와 이혼을 부추긴 처가댁 식구들 심지어 어린아이까지 8명에 대한 철저한 살해계획을 세웠었다.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전 나는 마지막으로 광주에 계신 어머니를 뵙고 서울로 가는 기차 10시 40분 표를 예매해 놓았다. 그때가 86년 4월 3일 밤이었다.

그러나 서울로 가는 열차를 타기 불과 40분전 나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우렁찬 음성을 들었다. 귀에 고막이 터질듯한 아주 크고 우렁찬 음성이었다.

“여봐라! 여봐라!”

너무도 이상하여 대문 밖으로 나가 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의아해하며 다시 방으로 들어와 피우려던 담배를 손에 쥐고 성냥불을 막 그으려는 순간 갑자기 방안이 환해지는 것이 아닌가. 깜짝놀라 엉겹결에 문쪽을 바라보는 순간 나는 놀라움에 소리치고 말았다.

선명한 일곱 빛깔의 무지개 빛이 내리깔리면서(요한 계시록 4:3) 그 빛 가운데로 위에서 어떤 물체가 내려오는데 자세히 보니 하얀 옷을 입은 한 사람이었다(요한 계시록 1:13). 밝은 빛 때문에 얼굴은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분명 우리와 같은 사람의 형상이었다. 이윽고 그 하얀 옷을 입은 사람 뒤로 네모난 모양의 마차가 따라내려오고 있었다.

그 마차에는 의자 셋이 있었는데 가운데는 비어 있고 양쪽에는 하얀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아마 내가 예수믿는 사람이었다면 분명 큰 감동을 느꼈겠지만 나는 그쪽으론 전혀 문외한이었기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하지만 한가지 이상한 것은 불타오르던 증오심이 싹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옆에서 주무시던 어머니를 깨웠지만 어머니의 눈에는 이 장면이 보이지 않았고 쓸데없는 소리 말라며 다시 주무셨다.

내가 다시 마차를 쳐다보았을 때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나와 똑같은 사람이 비어있는 가운데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분명 몸을 만져 보며 확인했는데 마치 거울을 보는 듯 했다. 그 마차에 앉자마자 마차는 출발했고 나는 그 때부터 천국과 지옥을 생생히 보게 되었다.

눈이 부실만큼 찬란한 황금빛 길을 지나 세상에선 맡을 수 없는 꽃향기를 맡으며 꽃밭길을 지나 나와 같은 사람들이 있는 곳을 지나치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나는 세계각국의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계 7:9).

그리고 나는 예수를 믿다가 병환으로 돌아가신 외삼촌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병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고 외삼촌의 모습은 내가 초등학교 3,4학년 때 보았던 젊은 얼굴과 체격으로 싱그러운 30대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 얼굴에는 이 세상의 염려와 근심을 모두 떨쳐 버린 평화와 기쁨만 빛나고 있었다(요한 계시록 21:4). 계속해서 들려오는 은은한 음악소리를 들으며 황금마차는 몇날 며칠이 되도록 달려 황금빛 찬란한 집들이 있는 곳을 지나게 되었다. 무슨 질문을 해도 대답이 없었던 내 옆의 천사들은 비로소 이곳에 이르러서는 분명한 목소리로 **“여기가 천국입니다”**라고 말해주었다.

그 집들은 내가 볼 수 있는 데까지 길다랗게 뻗쳐 지어져 있었는데 도저히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세상에선 볼 수 없는 눈이 부실 정도로 황금빛 찬란한 집들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전부가 새로 지은 듯 말끔히 단장하고 있었고 누군가가 금방이라도 이사올 듯이 채비를 갖추고 주인을 기다리는 모습이었다는 점이다(요 14:2~3).

외삼촌이 있는 곳과는 달리 이곳에선 단 한 사람도 볼 수 없었다. 이에 대한 질문을 했지만 역시 대답은 들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마차는 밤처럼 캄캄한 곳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다만 마차를 인도하는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의 형상으로 된 보름달 크기만한 불빛이 비치는 곳만 환할 뿐이었다. 들려오던 음악소리도 멎어 있었다.

어느새 내 마음 가운데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아름다운 것들을 잔뜩 보여주더니 이젠 죽여 버릴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며 겁에 질려 있었다.

어느새 앞에 사람의 형상을 한 불빛은 한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6년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보게 되었다.

아버지는 생전에 유교학자로 향교에서 장의까지 지내며 문중 일도 도맡아 하던 집안에 대들보와 같은 분이셨다. 살아계실 때 예수의 '예’자만 들어도 불호령을 치셨던 분이셨다. 그런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는 병환으로 온몸이 퉁퉁 부어 관을 두 개 크기로 짜야할 만큼 비참했는데 이곳에서 본 아버지의 모습은 돌아가시기 직전 그 비참한 모습 그대로 고통을 당하고 계셨다.

발목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세모난 머리를 한 새파란 독사들이 구물구물거리며 아버지의 온몸을 기어다니면서 물어뜯고 찢고 할퀴어서 아버지의 온몸을 피투성이로 만들고 있었다. 나는 울부짖고 통곡하며 아버지를 불렀지만 아버지는 나의 이 애타게 부르는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셨다.

두 번째로 간 곳은 수많은 사람들이 둥그스름한 화로 위에 그 크기를 가늠할 수조차 없는 큰 석쇠같은 철판 위에서 훨훨 타오르는 불꽃을 피해 우르르 몰려다니고 있었다. 한마디로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요한 계시록 20:15). 이곳에서 나는 또 다른 익히 아는 사람을 보게 되었다. 바로 생전에 돈이면 만사형통이라며 구두쇠같이 살다간 큰아버지의 모습이었다. 큰아버지도 역시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셨다.

셋째 불빛이 비친 곳에서는 교통사고로 죽은 친구를 보게 되었는데 온몸이 세 마리의 보기에도 흉칙한 구렁이에게 감겨 어찌나 세게 조였는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이 친구 역시 나와 같이 술을 좋아하다 결국 술로 인해 생명을 잃은 사람이었다.

넷째로 불빛이 비추인 곳에서는 깊은 늪, 수렁 속에 허리부분까지 빠져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는데 거기에는 이름 모를 조그맣고 시커먼 짐승들이 앞 뒤 옆에서 치고 뜯고 할퀴고 해서 피투성이를 만들고 있었다. 도망가지도 못하고 몸만 좌우로 움직여 짐승을 피하느라 고통받고 있는 수많은 사람 중에서 친척과 같은 고향 사람 이렇게 두 사람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당시엔 몰랐지만 사실 그 친척은 교회에 다니기는 했지만 교회가면 병이 낫는다는 말을 듣고 구원의 확신없이 그저 교회 문턱만 왔다갔다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쪽 다리는 교회 안에 들여놓고 다른 한쪽은 교회 밖 세상에 놓고 건성으로 다닌다면 시간만 축내며 결국 허송세월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마 7:21).

지옥에서 본 아버지와 천국에서 본 외삼촌 이렇게 내가 본 지옥의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곳이었다. 그 어둡고 비참한 곳에서 나는 아버지, 큰아버지, 친구, 친척, 고향 사람들을 분명 보았고 저들을 보며 울부짖을 밖에는 달리 힘이 없었다.

이 세상 살다가 죽어버리면 그만인 줄 알았던 나는 진실과 맞닿게 된 것이다. 지옥을 본 후 마차가 처음으로 멈춰선 곳은 '심판대’라는 곳이었다(요한 계시록 20:13). 이곳에서 나는 내가 태어나서 눈, 입, 손과 발 그리고 마음속으로 지은 죄까지 적혀 있는 '회고록’이란 것을 보았다.

내가 세상에 살면서 지은 죄의 종류가 무려 1백32종류나 되었고 각각의 종류별로 세분화되어 그 가짓수는 이루 헤아릴 수 조차 없었다. 그중 술먹고 실수한 죄 밑에 가장 많은 가짓수가 뻗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고린도전서 6:10, 로마서 13:13).

또 한 가지 알게 된 것은 세상살이에서는 죄가 되지 않지만 이곳에서는 죄가 되는 항목 두 가지를 보게 되었다. 하나는 예수를 믿지 않은 것이요, 둘째는 예수 믿는 사람을 욕하고 멸시, 괄시하며 핍박한 것이 죄라는 것이었다.

교회에 다니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성경, 찬송가를 찢고 불에 쳐넣어 태워버린 일, 전도하는 친구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멸시하고 심지어 발길질에 뺨까지 때렸던 지난 날의 죄가 시간과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록돼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내내 궁금히 여기던 질문을 했다.

"왜 예수믿는 일이라면 물불을 안가린 형님 같은 사람에게 이런 곳을 보여주지 예수라면 징그럽게 싫어하고 세상에서 온갖죄를 저지른 죄인인 내게 왜 이런 곳을 보여 주냐"고 말이다. 이러한 물음에 내 옆에 있던 천사가 답해주었다. "너희 형님같은 사람은 이런 곳에 올 필요가 없다. 너와 같은 사람이 네 눈으로 직접 보아야지 천국와 지옥이 있다는 것을 믿고 세상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그렇다. 형님처럼 보지않고 믿는자가 더 복되다는 성경말씀과 일치하는 답변이었다(요한복음 20:29).

이윽고 마차는 다시 출발했고 갑자기 밑도끝도 없이 무조건 “믿겠느냐?” 하는 크고 우렁찬 음성이 다시 내 귓전에 들려왔다. 이 음성은 내가 일가족 여덟명을 죽이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기 40분전 방안에서 들었던 바로 그 음성이었다.

당시 나는 그때까지 단 한 번도 하나님 아버지를 불러보지 않았으면서도 "주여! 믿습니다!"라는 대답이 절로 나왔고 주님을 영접했다. 그러자 뒤이어 말씀하시기를 "이제 세상에 나가면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도 보태지 말고 빼지도 말고 네가 본 그대로 증언해라"라고 하셨다.

그리고 마지막에 헤어지면서 들려주신 음성은 "두고 보리라!"였다.

이렇게 몇날 며칠 동안 긴 여행을 한 것 같았는데 깜짝 놀라서 벌벌 떨며 깨어보니 밤 11시 10분이었다. 불과 70여분 사이에 이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는 숫자의 개념도 시간의 개념도 없었던 것이다(베드로후서 3:8).

정신을 차려보니 어머니가 방 한구석에서 벌벌 떨며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계셨다. 어머니 말을 빌자면 내가 한 시간이 넘도록 세상에서는 무슨 말인지 모를 말들을 혼자 중얼중얼거리는데 아무리 흔들어도 모르더라는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지금까지 내가 본 것을 있는 그대로 어머니께 상세히 말씀드렸다.

예수의 '예’자만 들어도 아버지처럼 불호령을 치셨던 어머니께서는 당신 남편의 비참한 얘기를 들으시곤 눈시울을 적시셨다.

이렇게 어머니와 난 예수동창생이 되어 함께 학습세례도 받고 같은 날에 집사가 되기도 했다. 이제 얼마나 열심히 교회에 다니시며 전도하시는지 나 못지않은 열정을 가지신 분이 되셨다.

이 때부터 내 삶은 180도 변화되었고 이젠 내 주먹을 믿으라가 아닌 오직 주 예수를 믿으라가 입술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사람이 되어 지금껏 전도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오게 된 것이다.

지금도 내 귓가에 맴도는 “두고 보리라!” 하신 주님의 마지막 명령이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것이다.

박영문씨는 회심한 이후 장로로서 천국과 지옥을 열심히 증거하며 사역하시다 2009년 6월 소천하셨습니다. 간증에 나오는 박영문 장로의 형은 박영우 목사로 현재 광주 안디옥 교회를 담임하고 계십니다.

23. 세계 최고의 증권 회사 부사장에 오른 한국인의 성공 스토리 - 브라이언 박 목사님 간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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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 허무했던 성공 신화

저는 과거에 예수님을 전혀 몰랐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불교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서, 중3때 미국에 이민을 갔습니다.

미국에 이민 가서,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명문 대학 다 나오고 졸업하자마자 ‘로스쿨’ 가려고 준비하다가, 메릴린치라는 세계적인 증권회사에 입사해서, 하루에 18~19시간씩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 회사 입사한지 몇 년 안 되어서, 제가 그 회사의 부사장까지 올라갔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지금까지 제가 그 회사의 최연소 부사장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 나이 26살에, 세계에서 제일 잘 나가는 증권회사에 부사장으로 올라갔었습니다.

불과 십 여년 전만 하더라도, 저는 영어 한마디도 못했던,머리 빡빡 깎은 중3 학생이었는데, 십 여년 후에, 세계에서 제일 잘 나간다는 그 증권회사에 최연소 부사장으로 딱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부사장으로 올라간 순간부터, 제게 엄청나게 많은 부가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가 받았던 연봉, 제 친구 열 명이 벌어도 만져보지도 못할 액수였고,

때로는 제가 한 달에 버는 돈이, 웬만한 분들이 평생 벌어도, 만져보지 못할 정도의 돈을 저는 단 한 달에 번 적도 있었고, 또 한 달만에 다 써본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제가 그때는 상당히 교만해서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것이, 돈 버는 것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자고 일어나서 아침에 회사에만 가면, 남들이 상상도 못하는 그런 돈을 벌고, 또 쓰고, 그렇다 보니까, 세상에서 흠모하는 그런 많은 것을 누리게 되었고 그리고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것을 달성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일찍 성공 한 것이죠, 출세 한 것이죠. 한국일보나 미국에 있는 다른 신문에 제 기사가 나오면서 저는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을 때마다, 저는 제 교만에 가득 차 있어서, ‘그렇지. 내가 역시 이렇게 멋진 놈이야.’ 하면서, 나의 교만이 가득 차서 살았었습니다.

그리고 돈이 많다보니까, 제가 갖고 싶은 것도 꽤 많이 가졌습니다. 제가 그때 좋아 했던 것이, 제가 자동차를 꽤 좋아했는데 저희 집 차고에는, 남들이 생전 타보지도 못하고, 발음하기도 힘든 차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냥 오래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타다가 싫으면 버리고, 아니면 사고 나서 조금이라도 깨지면 아예 버리고, 그런 식으로 고급차를, 아주 헌신짝 같이, 샀다가 버리기를, 거듭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돈을 많이 벌면 제가 참 행복할 줄 알았는데…제가 돈도 많이 벌어보았는데… 참 뭔가 행복 한 것이 없었습니다. 평소의 제 생각에는 (또한 일반 사람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명문대를 나와서 좋은 학벌이 있으면… 참 제게는 기쁨이 넘칠 줄 알았는데, 실제로 그것을 경험한 제게는… 아무 기쁨이 없었습니다.

어디 명문대학 간판 말고도,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그래서 돈도 많이 벌고, 그래서 비싼 차를 몰고 다니고, 그래서 사람들한테 칭찬을 받으면 제 기분이 붕 떠서, 저한테 뭔가 기쁨과 행복과 만족… 그런 것들이 넘칠 줄 알았는데

실제로 제 삶에는, 그런 것이 가면 갈수록 없어졌습니다. 처음에 잠시 그런 기쁨이 있었는지 몰라도, 시간이 갈수록 그 기쁨이 희박해 지는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들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는 ‘공부 열심히 해라. 공부 잘 해라. 그래서 좋은 대학교 가라. 좋은 직장 잡아라.’ 그래서 제가 학생 때, 열심히 공부 했습니다.

처음 중학교 때는 영어 한 마디도 못하던 제가, 열심히 공부해서 미국의 일류 대학교도 들어가고 열심히 일해서 어느 정도 수준(증권회사 부사장)까지 올라갔는데, 그제야 비로소 '부모님 말씀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그 때부터 부모님이 저에게 심어준 그 세상적 관념이 ‘다 맞는 말은 아니다.’ 라는 걸 제가 깨닫게 되었습니다. 부사장이 된 이후, 최고급 자동차를 여러 대 사서 타고 다녀보았지만, 거기에 참된 만족과 행복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할까, 더 기뻐볼까, 조금 더 누려볼까?’ 그래서 계속해서 마시던 비싼 양주도, 더 많이 마셔 보았습니다. 계속해서 피우던 담배도 하루에 두 갑씩 피웠고, 그런데 한 자리에서 양주 두 병씩 마셔도…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이것도 안 되는구나. 뭔가 더 있겠구나.’ 그래서 마약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약과 담배와 술을, 제가 36살에 예수님을 만나기까지, 이전부터 21년 동안,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미국 사회는 조금 희한 합니다. 제가 개인생활로 어떻게 살던지… 사람들은 상관 안 해요. 제가 회사에 돈만 많이 벌어주고, 제 실적만 높으면, 이 사람들은 제가 뭐 하는지 상관 안했습니다.

매일 매일 거듭되는 그런 술과 담배와 마약, 그렇지만 회사에 나가서는 완전히 일에 푹 빠진, 일 중독 된 사람처럼,열심히 일 해서 회사에 돈을 벌어주면, 저를 간섭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제가 회사에서 받는 그 돈(연봉+)을 갖고, 정말 제가 마음껏 누리고 마음껏 쓰는데도, 뭔가 행복하지 않아서 계속해서 돈과, 담배와, 술과, 마약에 그리고 다른 향락에 계속 어울려서 하루하루 살았는데 그런데도 어떤, 제 삶에 돌파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점점 나의 존재 이유를 모르게 되었고, 여기까지 왔는데, 성공했다고, 출세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아니구나!’ 라는 걸 알고 나니까 허탈감이 생기고, 우울증이 생겨서, 결국에는 두 번이나 제가 자살을 시도해 보았는데, 그것도 안 되었습니다.그 러다 보니 하도 이것, 저것 많이 하다가, 몸(건강)이 많이 망가졌어요.

제가 대학교 때, 역기를 들다가 허리를 다쳐서 16년 동안 허리디스크를 앓았습니다. 제 왼쪽 허리디스크를 보면 2번과 3번 디스크가 없어요. 지금도 엑스레이를 찍으면 디스크가 없습니다.

그래서 뼈와 뼈가 닿는 아픔을 16년 동안 앓았었고, 제 왼쪽 발뒷꿈치에 종양이 있어서 절뚝거리며 걸었고,또 하도 제가 술을 많이 마셔서, 위장과 간을 버려서 소화불량이고, 위산 역류 때문에 제가 좋아하는 김치도 10년 이상 먹지 못하고, 제 온 몸 전체에 스트레스가 많아서, 머리도 원형 탈모로 다 빠져버그리고 온 몸 전체에 알러지가 나는 피부병이 있었고, 제가 하도 몸이 아픈 게 많아서, 밤새 앓는 아픔에 깨어나자마자 제가 아침에 첫 번째로 하는 일은, 제 침대 옆에 담배를 피워 물고 다음에 하는 것은, 제가 진통제를 먹기 시작합니다.

아침에 깨어나서 낮 12시까지, 진통제(타이레놀 같은)를 제가 20알을 먹지 못하면 거동을 못할 정도로, 온 몸이 다 망가진 상태로 하루하루 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돈이 있으면 뭐 합니까, 그렇게 몸이 아픈데… 돈이 있으면 뭐 합니까. 제 인생을, 완전히 목적 없이 하루하루 살았는데, 그 허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제가 성격이 상당히 난폭했었어요. 성격이 상당히 난폭하고, 급히 열 받는 성격이라서, 사람들하고 이야기할 때도, 여차하면 제 난폭한 혈기로 주먹이 나가는 바람에 제가 감옥도 8번 다녀왔어요. 거의 다 폭행으로요. 제가 평소에는 굉장히 선량한 사람이에요.그런데 마음껏 술 마시고, 마음껏 마약하고 나니까… 몸만 망가지는 게 아니라, 성격도 자꾸 이상하게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해는 제가 차 사고를 너무 많이 내어서, 19번이나 차 사고 낸 적이 있었어요. 그렇게 저도 갈비뼈가 부서지고 했는데, 어떻게 그때그때 마다 신기하게 살아났습니다. 차 사고를 냈지만, 제가 죽지는 않았습니다.

하루하루 갈수록, 돈 버는 게 인생의 목적이 아니고, 하루하루 갈수록, 제 인생은 더 깊게 빠지기 시작 했습니다. 허무에 지친 제가, 진리를 찾아 헤매기도 했었습니다. 그때 제가 제일 궁금했던 것이 뭐냐면

‘도대체 나의 존재 이유는 뭔가? 내가 왜 살아있나? 내가 돈만 벌라고 살아있나?’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분명히 나는 나 보다, 나라는 존재보다, 나보다 더 큰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나서 공부도 했고, 일도 하고 있는데…’ 막상 보니까… 나만 위해서, 나의 향락을 위해서, 나만을 위해서 사는 것을 보면서, 그 절망가운데서, 저는 그래서 여기 저기 다니면서, 어떠한 해답을 찾으려고, 애를 쓰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주변에 예수 믿는 분들을 만나게 되었었고,그들을 만나서, 예수님에 대해서 들을 때마다 제 마음속으로 ‘참 그들의 믿음이 허황되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한 번도 안 만난 사람(예수님). 어떻게 그 사람을 믿는 것을 통해서 구원이라는 것을 얻게 되냐?’

그래서 저는 그때 아주 악독하고 고약한 그런 취미가 있었습니다. 그 취미는, 예수 믿는 신자들을 만나서, 그들하고 길게 논쟁을 합니다. 논쟁을 하면서, 그들의 믿음이 얼마나 허황되고 하찮은 것인지 제가 지적해 줘서, 그들을 교회와 예수를 떠나게 하려 했습니다. 그 순간에 제게 정말 큰 쾌감이 왔어요.

‘그래, 거봐, 너네가 믿는 그 예수, 가짜야.’

그러면서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한 것은 물론이지만, 예수님을 엄청 깔보고 제가 무시했었습니다. 그러나 제 인생은 정작 하루하루 더 악으로, 더 어둠으로, 술과 마약과 담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더 나아가서 하도 마약을 많이 해서, 제가 두 번이나 심장이 멈춰서 잠깐 죽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또 기적적으로 깨어나고 했던 것이지요. 그러면서 하루하루 지나갔습니다.

‘내 인생의 목적이 뭔가?’

23.2.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임재

제가 서른 여섯 살이 된 해 1994년 6월 17일 어느날 밤이었습니다. 커피를 사려고 저는 운전하며 형과 함께 편의점으로 갔었습니다. 형이 편의점에 들어가고 저는 정차한 상태로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분이 제 차로 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믿습니까?”

평소 같으면 귀찮게 전도하려는 얘기를 듣기 싫어서 예수님 믿는다고 거짓말을 하는 저였지만, 그날 따라 기분이 좋지 않아 퉁명스럽게 믿지 않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분은 “제가 당신을 위해 기도해도 되겠습니까?” 라고 이야기했고, 저는 얼떨결에 그러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제게 다음과 같이 따라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 당신의 보혈로 저의 죄를 씻어주시고, 제게 성령이 임하게 해주세요."

너무나 자주 들었던 상투적인 얘기였지만, 저는 얼떨결에 따라하고 말았습니다. 기도가 끝나고 저는 궁금한 마음에 누군지 물어보았고 그 분은 목사님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인근에서 집회를 하느라 지나가던 중에 저를 우연히 보게 된 것이었죠. 그 분은 제게 집회 전단지를 하나 건네주었고, 저는 그 분이 가고난 후 전단지를 구겨버렸습니다.

커피를 마신 형이 들어온 후 갑자기 제게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갑자기 제 자신도 주체할 수 없이 통곡이 나오고 뜨거운 눈물이 흐르는 것이었습니다. 눈물이 너무나 뜨거워서 운전을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잠시 울음을 멈춘지 1~2분이 지나자 이번에는 내 입에서 알 수 없는 말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튀어나오기 시작했고, 그 다음에는 내 의지와 무관하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내 온 몸이 떨리면서 몸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런 현상이 1분에 1회씩 20분간 지속되었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형이 어떻게 된 일이나고 제게 물었고, 저는 정차해 있는 도중에 만난 목사님 이야기를 했고, 전단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자 형이 깜짝 놀라며 내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형이 전날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아버지가 꿈에 나타나서 내가 어떤 사람을 통해 내일 너에게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는데, 형이 꿈에서 본 사람이 바로 전단지에 나온 이 목사님이라는 것이었습니다.

20여 차례에 걸쳐 더러운 몸에서 뭔가가 빠져나간 후, 저는 살면서 처음으로 ‘이것이 정말 깨끗한 것이구나’ 라는 기분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평안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1994년 6월 17일, 제가 길에서 운전을 하다가, 제가 그렇게 핍박했던 예수님이, 저의 차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 분과 인격적인 만남이 있었었고, 그리고 그 이후로도 여섯 시간 동안, 초자연적 사건이 제게 있은 후에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뭐라고 하더라도 저는 예수님을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분과 정확한 인격적 만남이 있었고, 그리고 그때부터 제 삶이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저를 만나주신 그 순간,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그 분의 강력한 능력으로 술과 담배와 마약을 한순간 끊게 도와주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허리에 있던 모든 통증들, 16년 동안 앓던 제 허리 통증을, 하나님이 딱 2초 만에 고쳐주셨고, 제 왼쪽 발뒤꿈치에 있던 종양도 제가 하나님 말씀 듣고 있는데 싹 녹아서, 눈앞에서 없어지게 하셨고, 위산역류, 모든 것 다시 깨끗이 고쳐주셨고, 제 몸에 있는 모든 통증과, 제 몸에 있던 모든 두드러기 고쳐주셨고, 그리고 원형탈모, 하나님이 머리가 다 낫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보시는 지금 제 머리, 심은 게 아니라, 새로 돋아난 제 머리카락입니다. 거기다가 더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제 건강을 회복시켜주셨어요. 제가 30년 동안 항상 제 건강에 자부심 갖고 그렇게 살았었는데 제가 진짜 세상에 푹 빠져 있었을 때 제 건강은 아주, 아주 비참하게 다 바닥까지 내려갔었는데 하나님께서 저를 만나주시고, 저를 치료해주시고, 저를 회복시켜주시고 그 다음에 건강도 회복시켜주시고, 얼굴도 고쳐주셔서,

제가 지금 나이가 55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저를, 30대 후반으로 착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웬만한 30대보다 더 건강하게 세상을 다니면서 예수님을 증거 하게 하십니다. 건강을 회복시켜 주셨어요. 다 하나님이 하셨어요.

너무나 놀라운 것은, 제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자랑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번 한 달에 집회가 아홉 번이 있어요. 그렇다 보니까 매일 저녁 금식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저녁금식 하고 왔는데,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세요.

'아니 어떻게 저녁 금식하고, 이렇게 설교할 힘이 나오냐’고.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셨어요. 하나님이 계속해서 저를 붙잡고 계시고, 계속해서 제 인생에 정말 놀랍게 놀랍게 역사하고 계십니다.저는 지금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안에 거하고 있습니다.

저하고 제 아내는 항상 함께 이야기 합니다. 저하고 제 아내가 세상에서 가장 확률이 낮은 로또를 이긴 사람이에요. 73억대 1 확률의 로또를 이겼습니다. 이 세계에 있는 모든 인구가 73억이라고 하는데, 그 73억 명 중에, 저하고 저의 아내같이 행복한 사람은, 또 없을 것 같아요.

세상에는 돈으로 못사는 것이 꽤 있습니다. 제가 돈이 있어 봤습니다… 그러나 행복이 없었어요. 좋은 차 있었습니다. 기쁨이 없었어요. 좋은 학벌과 좋은 직업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평강이 없었는데요, 하나님께서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기쁨과 평강과 행복과 그리고 소망을 회복 시켜주셔서 제가 다니면서, 지금 그 기쁨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종교’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저는 그냥 제가 만난 예수님을 증거 합니다.

그냥 제가 그날 만난 예수님, 그 분을 여러분이 한 번이라도, 한 번이라도(반복 강조) 제대로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면 하나님께서 나를 변형시키시고, 하나님께서 사울에서 바울로 변형transformation 시켜서, 하나님의 종으로 크게 쓰신 것처럼, 하나님께 영광 돌린 것처럼 제 소망은, 세계를 다니면서, 제가 만난 예수님을 전해서 여러분이 한 번이라도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여러분 역시 사도바울보다, 저보다, 더 영향력 있는 간증자로 예수님께 영광 돌리며 삶을 살 것이고, 제가 그걸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회를 다니는 것입니다.

그 한 소망으로, 저는 지금 세계를 다니면서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감사한 것은, 이 세계를 다니면서 제 자비로 다녀요. 자비로 다니면서 제가 만난 예수를 증거하고 다닙니다. 저는 참 부자에요. 어떻게 부자냐고요? 제가 지금 가진 돈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아버지가 부자에요. 우리 아버지가 부자이기 때문에 저는 참 부자입니다. 제가 지금 주머니를 턴다면 여러분들보다 돈이 없을지 모르지만 상관 없습니다. 참 우리 아버지가 부자이기 때문에, 그 분의 뒷배경으로, 제가 하루하루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23.3. 예수님을 만난 후 받게 된 은사

그런데 감사한 것은 예수님을 그렇게 만났는데, 제가 가서 만난 것이 아니고, 그 분이 저를 찾아오셨죠. 그리고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한 3주째, 그냥 흔히 이야기하는 똑딱 신자지요. 성경책만 끼고 교회만 왔다 갔다 했는데 한 3주일 지나갔는데, 제 안에서 ‘이왕 이런 김에 한번 수요예배라는 것을 가봐야겠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성령님이 인도하셨더라고요. 제가 수요예배를 갔습니다. 수요예배를 갔는데, 거기서 막 사람들이 통성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저도 모르게 제 혀가 막 이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알고 보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제게 방언하게 하셨어요.

여러분들 흔히 이런 말 하죠. 방언이 터졌다고. 그런데 여러분 성경 어디에도 방언 터졌다는 말 없어요. 그냥 방언 했어요. 방언 ‘터지지’ 마시고, 그냥 ‘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그날, 그냥 방언 하게 되었어요. 그 후로 방언으로 계속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데, 저는 몰랐는데 그때 보니까 고린도전서 12:8~10절에 성령님의 은사가 있는데, 그 아홉까지 성령님의 은사를, 하나님께서 한꺼번에 제게 다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그때부터 누구를 위해서 기도하게 되면… 하나님이 고치셨고, 누구를 위해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회복시키셨고, 정말 엄청난, 예언부터 시작해서 너무나 많은 일들을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 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는 저에게 좋았다가 조금 불편해서 목사님께 찾아갔더니 목사님께서 은사가 맞긴 맞는데, 저보고 은사에 치우치지 말고, 말씀으로 하나님과 교제하고 만나라’고 하셔서 그때부터 계속해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계속 만나고 말씀을 통해서 하루하루 성장되고

그리고 같은 해에 1994년 10월 7일. 주의 종으로 부름 받아서 신학대학원을 끝내고, 교회 개척해서 한동안 교회 사역하다가 제가 부르심이 '순회 설교자’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교회를 닫고, 지금까지 지난 8년 동안 제가 세계를 다니면서 예수님을 증거 하는 부흥사(순회 설교자)로 하나님이 세워주셨습니다.

제가 참으로 놀라웠던 것은, ‘어떻게 저 같은 사람이 예수를 믿는가?’ 입니다. 세계에 7대 불가사의가 있다고 합니다. 제게는 그보다 더 놀라운, 개인적인 두 가지의 불가사의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소망이 있습니다.

저같이 죽어 마땅한 더러운 벌레 같은 놈이, 이렇게 예수님 만나서, 예수님 삶을 증거 하는 것을 볼 때, 저보다 더 근본적으로 아름답고, 더 믿음 있는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나님이 더 크게 쓰실까 그런 소망을 갖고, 제가 (집회를) 다니게 됩니다. 제 소망은, 진짜 제가 만난 예수님을 여러분이 한번이라도 만났으면, 한번이라도 만났으면, 여러분의 삶이 완전히 뒤바뀌고, 여러분 역시 삶으로 예수를 증거하고, 예수님의 증인이 되기 때문에 그 한 가지 소망을 갖고, 부족한 제가 지금 세상을 다니며, 예수님을 증거 하고 있습니다.

24. 불법을 행하면 내가 사랑하는 자라도 지옥에 갈 것이다

어느 날 기도시간에 주님께서는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러나 네가 불법(불순종)을 행하면 사랑하는 너라도 지옥에 갈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말씀대로, 법대로 집행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며, 의로우신 재판장 이시기에 그러실거라고 의심없이 주님의 말씀이 믿어졌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날 큰 충격을 받아서 지금까지 덜덜 떨리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주님을 경외하며 살아갑니다. 지옥에는 주님을 사랑했었던 무수한 영혼들이 있습니다. 알고 지은 죄, 작은 죄로 여기고 회개하지 않은 죄, 반복하여 지은 죄, 성령을 모독한 죄 등… 용서를 받은 후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한 죄로 인해 지옥에 있습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하신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만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이와같이 망하리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지옥이 입을 벌리고 지상에 있는 회개하지 않은 영혼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믿든, 안믿든 말입니다. ‘회개자 천국!’ ‘불법자 지옥!’ 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이 얼마나 위험합니까?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조차도 지옥이 지구 속에, 우리가 항상 밟고 다니는 땅 아래에 있는지도 모르고 삽니다. 사람들의 한 발자국 바로 앞이 천길 낭떠러지 지옥입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시며 지옥가지 말고 천국 영생에 들어가라고 하신 말씀을 등뒤로 던지고,

아니야 믿는 자들은 지옥에 가고 싶어도 못가!

하며 잘못된 교리를 따르면서 자기는 틀림없이 천국에 간다고 착각을 하며 사는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정말 성경을 자세히, 천천히 다시 읽어봐야 합니다. 나 자신은 정말 성경을 믿는가? 교리를 믿는가? 예수님의 진리말씀을 믿고 따르는가? 사람들의 말, 신학자의 말을 믿고 따르는가?

신중하게 베뢰아 성도들처럼 우리는 성경을 주의깊게 살펴야 합니다. 내 영혼이 천국 가느냐! 지옥 가느냐! 가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예수님 잘 믿는다고 생각했으나 말씀대로 살지 않았다면 불법자로 산 것입니다. 주님은 불법자들을 향해 단호히 “이 불법을 행한 자들아, 도무지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니 나를 떠나가라!” 하십니다.

결국 지옥에 떨어져 슬피울며 이를 갊이 있습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불법자는 지옥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셀 수 없이 수많은 영혼들이 그 무서운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인구가 78억이라고 하는데, 하루에 23만명이나 죽는다고 합니다. 그중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자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크리스쳔들이라도 회개하지 않고, 거듭나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여 살면 그 천길 낭떠러지(약 6400km) 죽음의 터널,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니까, 교회에 다니니까, 절대로 지옥은 안가고 천국에 간다고 속고 있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요한복음 3:3,5)

어느 지옥 간증에서 보니까 지옥에는 불구덩이가 매우 많이 있어서 “예수님! 왜 지옥에는 불구덩이가 이렇게도 많나요? 하고 여쭈어보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그 많은 불구덩이는 지상에서 살다가 회개하지 않고 지옥에 오는 자들이 들어갈 곳이다.” 라고 말씀해 주셨다고 합니다.

영안이 열린 자가 환상 가운데 보니, 지옥으로 떨어지는 자들의 모습이 마치 쓰레기가 우수수 떨어지듯이, 추풍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듯이 하더래요. 이처럼 죄를 회개하지 않는 자의 최후가 결국은 지옥입니다. 그래서 지옥에 가지 말라고 회개하라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회개는 지옥의 탈출구요, 천국문을 여는 열쇠’이니 우리가 어찌 회개를 등한히 하겠습니까.?

오 ~ 성령님이시여! 우리를 도와주소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회개를 도와주소서! 죄를 끊고, 죄와 상관없이 살아가도록 죄를 이기는 능력을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옵소서! 주님을 위해서 살고자 하면 좋아했던 세상 것들을 다 버려야 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옥에서 견딜 수 없는 영원한 고통을 당할 것을 생각하면 이런 고통은 고통도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우리의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는 고통은, 영원히 지옥의 고통을 견뎌내야 하는 것 보다는 아주 작습니다. 이 세상에서 겪는 고통들이 아무리 크다 하여도 지옥에서 당하는 고통보다는 지극히 덜합니다.

죄는 지옥보다 더 악하고 악합니다. 왜냐하면 죄가 지옥을 잉태하였기 때문입니다. 죄로부터 도피하라! 속히 도망가라! 왜냐하면 죽을 때는 너무나 늦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회개할 모든 기회가 죽음과 함께 끝나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나를 죽이기 전에 먼저 내가 죄를 죽여야 합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죄를 회개하면 살길이 있는데… 지옥을 피할 수 있는데… 굳이 마귀의 꾀임에, 유혹에 빠져서 죄를 즐기다가 지옥 갈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존귀하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자들입니다. “사람은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자는 멸망하는 짐승과 같도다”(시편 49:12,20) 하셨습니다. 우리는 존귀한 자, 깨닫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자유의지를 가진 우리들의 선택은 자유로우나 심판은 각자가 선악 간에 받습니다. 죄에 지면 죄의 종, 마귀의 종입니다. 진 자는 이긴자의 종입니다. 그러나 죄를 이긴 자는 천국의 열두 진주문으로 들어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며 주와 함께 영생을 누리며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받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25. 지옥에 있는 크리스천들

25.1. 카라멜로 브레네스의 간증

1982년에, 나는 사고로 죽었었다. 죽음이 나를 엄습했을때, 모든 것이 깜깜했다. 나는 어두운 터널을 홀로 걷고있었고, 어떤 종류의 존재가 나를 데려가고 있었다. 춥고 어두운 터널을 걷고 있을때 끔찍한 비명과 신음소리를 듣기 시작했고, 몹시 무서웠다. 내 몸이 이미 죽었다고 알고 있었지만, 그 곳에서 나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큰 뱀들이 주변에 꿈틀거리고, 모든 사람들이 물을 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곧 각각 많은 사람들이 들어있는 방과 구역이 있는 언덕에 도착하였다. 나는 두려워서 울기 시작했고, 하나님께 자비를 간구했다.

주님, 저의 삶을 기억해주세요.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큰 공포가 몰려왔고 나의 전체 삶이 내 눈 앞에 펼쳐 지나갔다. 어떤 문 앞에 도착했을때, 나는 다시 소리쳤다.

나의 주님 ,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저를 도와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갑자기 침묵이 흘렀고, 큰 목소리를 들었다.

멈춰라!

그 소리는 지옥 전체를 흔들었고, 나는 어떤 존재의 손에 들려져서, 벗어나게 되었다.

나는 간음자의 하나님이 아니다. 나는 음행자의 하나님이 아니다. 나는 거짓말하는 자의 하나님이 아니다.흰소리하는 자들의 하나님이 아닌데 왜 너는 나를 주님이라 부르느냐? (누가복음 6:46)

나는 파괴되어지는 것 같이 느꼈으나, 한 순간, 부드러운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오라, 이곳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여주고 나의 길을 따르지 않고, 그들 자기 자신의 마음대로 걸어간 자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을 너에게 보여주겠다.

그리고 나서, 흔들 의자에 한 여자가 앉아있는 장소로 갔다. 그 곳에서는 무서운 신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괜찮아 보였지만, 그녀의 몸이 마녀로 바뀌고, 그녀가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면서, 화염 속에서 불에 타고 있었다. 그녀는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애걸했으나, 주님은 저에게 말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이곳에 오는 자는 다시 나갈 수 없다 (로마서 6:23)

주님은 저에게 많은 불순종한 사람들을 보였주셨고, 그들은 한때 크리스천이었다. 그들은 울면서 자비를 애걸하고 있었으나, 그곳에서는 자비란 없었다.

자비는 오직 이 땅에 살아있을때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자비는 성경말씀처럼, 더 이상 없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브리서 9:27)

예수님은 저에게 어떤 종류의 기름이 끓고 있는 장소을 보여주셨는데, 그 안에는 사람들이 화염 속에서 불타는 고통을 겪으면서 나가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귀들은 그들을 안으로 던져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나, 결코 회개하기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장소로 걸어갔습니다.

나는 목사, 전도자, 신자, 선교사들도 보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다른 이유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결코 성령님의 능력, 방언, 치유, 성령세례를 믿지않는 목사를 보았습니다. (마가복음 3:29)

그는 자비를 애걸하면서, 방언이 있고, 성령님이 계시고, 복음에 진정한 자유가 있음을 다시 한 번 세상에서 전할 기회를 달라고 간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너무 늦었습니다. 그는 목사이지만 결코 나갈 수 없습니다. 그가 회개할 수 있는 기회는 오직 이땅에 있을때 가능했습니다. 나는 또한 지옥에서 선교사를 보았습니다. 그는 아프리카 선교를 위하여 돈을 모금했는데, 그 돈의 절반을 자기가 착복했습니다.

그는 자비를 애걸하면서, 자기 돈이 아닌 그 돈을 돌려줄 기회를 달라고 간구합니다. 예수님이 그를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는, 그는 예수님을 저주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찬양했던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죽은 후에 회개할 기회를 놓쳐서, 회개하지 않은 죄에 대하여 자비를 간구하며 울고 있습니다. 십일조와 헌금을 강도질한 목사들을 보았습니다.

그들 또한 그들이 저지른 나쁜 일들을 회복할 기회를 달라고 애걸하였으나 더 이상 기회는 없습니다. 예수님 없이 죽은 사람은 지옥에 가고,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들은 천국에 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으면 영혼이 존재하는 것을 멈춘다고 생각합니다만(영혼절멸설), 그러나, 죽으면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영원한 삶이냐 아니면 영원한 저주와 부끄러움이냐 하는 진정한 삶이 시작됩니다 (다니엘 12:2)

당신은 바로 지금 그런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어디에서 영원히 있을 것이냐에 대하여 주의깊게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당신은 지옥에서 영원히 있을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영생을 누리고자 하는가? 그것은 당신의 선택입니다.

25.2. 지옥의 참상

모든 유형의 마귀들이 있는 무서운 장소로 계속 걸어갔습니다. 어떤 마귀는 팔이 하나, 눈이 하나, 굽이있는 다리가 하나뿐이었습니다. 얼굴이, 반쪽은 사람 얼굴이지만 나머지 반쪽은 텅비었습니다.

저는 주님에게 여쭈었습니다.

주님, 이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것들은 집 잃은, 파괴의 마귀들이다. 날마다 쉼없이 파괴할 것이다.

그곳에서 고통은 매우 무섭습니다. 그들이 이땅에서 했던 것들을 항상 기억합니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와 같습니다.(누가복음 16:19-31)

부자는 아버지와 다섯형제를 기억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삶에서 했던, 좋거나 나쁜 것들을 모두 기억합니다. 당신의 친척들을 모두 기억합니다. 이것은 고통의 일부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들이 지옥에 들어오지 않기를 필사적으로 원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땅에서 사람들에게 회개하기를 경고하며, 복음을 전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신을 구원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이시고, 당신을 구원해주시고자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 오른편에 계십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사도행전 4:12)

오직 예수님을 믿으세요.

25.3. 지옥에 있는 어린이들

두 어린이가 그들의 어머니에게 소리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교회 주일학교에 데려가지 않았어요? 왜 우리가 교회에 다니도록 허락하지 않았어요?

그들이 복음을 듣도록 결코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녀를 저주했습니다. 어린 자녀들이 지옥에 있다는 것을 기억할 때, 저는 지금도 여전히 고통스럽고 무섭습니다.

저는 12-14세 정도 되어보이는 몇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이땅에서 했던 많은 것들을 후회했습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어린이들은 결코 실족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만약 그 어린이가 선악간에 분별할 수 있는데, 주님의 길을 따르지 않고 있다면, 그들 또한 고통의 장소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잠언 22:6)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요한계시록 20:12)

선악 간에 분별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은 주님앞에 서야할 것입니다. 아무도 주님의 눈으로부터 숨을 수 없습니다.

경기장같은 곳으로 계속 걸어갔습니다. 거기에서 마귀들이 사람들을 비웃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을 조롱하고 고통을 가하고 있었습니다. 마귀들은 사람을 찢어서 일부를 숨기고 사람들이 그것을 찾아다니게 했습니다.마귀들은 고통을 주면서 즐기고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말합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요한복음 10:10)

사람들은 갈증 때문에, 필사적으로 물을 갈급하지만, 물이 전혀 없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태어난 것을 후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고나서 예수님을 떠나가는 것이 최악입니다.

만약 당신이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져서, 더 이상 주님의 길을 따르지 않는다면, 바로 오늘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날입니다. 당신의 친구나 다른 어떤 사람이 무어라 말해도 부끄러워 하지마세요. 주님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세요.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누가복음 9:26)

지금은 하나님 앞으로 달려가야할 때입니다. 구원을 찾으세요. 당신의 기분을 좋게하는 교회를 찾지 말고, 성령님이 운행하시고, 당신의 모든 죄를 회개하게 하는 교회를 찾으세요.

지금은 깊은 회개를 할 때입니다. 지금은 우리 주 예수님께 울부짖고, 달려갈 때입니다.

만약 당신이 죄를 품고 있고, 죄짓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면, 위험합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밤에 도둑같이 오리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

당신은 준비되어 있습니까?

25.4. 사탄의 고문

마귀들이 사람들을 고문하는 것을 계속 지켜봤다. 마귀가 사람의 눈을 떼어내서 숨기고, 그 사람은 그것을 찾으려고 고통을 받으며 몸을 끌고다녔다. 마귀들은 그런 것을 잔인하게 즐기고 있었다.

마귀들은 어떤 사람들의 팔과 다리를 떼어내고 또 그렇게 하였다. 주님을 한때 알았지만, 주님을 떠나 죄짓고 죽은 자의 벌은 두배로 훨씬 더 나빴다. (히브리서 10:26-27)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 또한 고통을 받지만, 예수님을 알았지만 실족하게 된 자들이 더 고통을 심하게 받고 있다. (베드로후서 2:21)

거기에 있을때, 나는 말로 이루 형언할 수없는 공포를 느꼈다.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울부짖고 있는 그들이 매우 불쌍했다.

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지옥에 떨어진 영혼들을 기다리고 있는 많은 것을 너에게 보여주겠다.

불타는 방들이 많이 있는 다른 곳으로 갔다. 방안에 있는 사람들은 타서 회색 뼈만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고통을 느낄 수 있고,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자비를 애걸하며 비명을 질렀다.

이 사람들은 한때 교회에 다녔고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삶 동안에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한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마귀를 내쫓고 방언을 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크리스천들은 여기로 내려와 있었다. 왜냐하면 어느 날, 하나님의 길에서 돌아섰기 때문이다.

25.5. 지옥으로 가는 길

주님이 말씀하셨다.

이 넓은 길을 보아라.

수많은 믿는 자들이 걷고있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들고 가고, 어떤 사람들은 기도하고, 어떤 사람들은 찬양하고 있었다. 넓은 길 오른쪽으로 하나님의 좁은 길이 있는데도, 크리스천들은 지옥으로 똑바로 계속 걸어갔다.

예수님은 설명하셨다.

그들은 이중생활을 하고 있다. 그들은 두 개의 삶을 살고 있다. 기도하는 나의 집에서의 삶과 그들 자신의 집에서의 또다른 삶

나는 주님께 말씀드렸다.

그러나 주님, 이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

예수님이 대답하셨다.

그렇다. 그들이 나에게 또는 나에 대하여, 울부짖고, 외치고, 좋은 것을 말할때조차, 그들의 마음에는 간음, 사악함, 거짓말, 속임, 미움, 쓴뿌리, 나쁜 생각들로 가득차 있다.

나는 이런 성경말씀 구절을 기억하고, 주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7:21)

많은 크리스천들 마음에 그들의 형제를 향하여 어떤 미움이나 쓴뿌리가 있고 심지어 그 형제 때문에 교회를 뛰어넘는다.

목사가,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 라고 물으면, “아멘!” 이라고 말하지만, 성경에는 그 형제를 미워하는자는 살인자와 같다고 말하고, 살인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태복음 5:22)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위기 19:17-18)

주님을 섬기는 자들이 천국에 들어가는데 성공하지 못하면 매우 슬픕니다. 당신은 이것에 대하여 진지하게 묵상하고 물어보세요.

나는 주님을 위하여 준비되어 있는가? 나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는가? 나의 삶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있는가?

당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고, 지옥을 피할 시간이 당신앞에 놓여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걱정하지 않고, 단지 삶을 즐기기만을 원합니다.

그러나, 여자가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술집에서가 아니라, 주님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생명이라고 저는 당신에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죽음과 죄악의 길을 걷고 있는 자들을 위하여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 거룩하게 살았다고 생각했던 많은 사람들이, 지옥에서 자비와 기회를 베풀어 달라고 애걸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보고, 나는 매우 마음이 아팠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요한복음3:16절을 설교하고 있는 듯한 여자를 보았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녀는 그녀의 남편을 결코 용서할수 없었고, 그녀의 남편을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거기에 있다.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6:14-15)

그녀는 복음주의 교회를 35년간 섬겼으나, 지금 지옥에 있고, 그녀의 남편을 용서할 기회를 달라고 애걸하고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과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마태복음 5:25)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7)

주님 앞에 울부짖는 자에게는, 주님의 자비와 은혜가 있으며, 그러나, 더이상 애통하지 않고, 더이상 기도하지 않으며, 기도 생활을 멈추었다면, 당신은 큰 위험에 빠진 것입니다.

용서는 특별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 여자는 결코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35년간 하나님의 일을 힘들게 하고도, 그녀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이것을 묵상하고, 확실히 당신은 용서하도록 하세요.

당신은 어디에서 영원히 살기를 원합니까? 저의 형제가 저에게

죽는 날 나는 지옥에 가서 마귀가 나를 고문하도록 하겠다

라고 종종 말했지만, 감사하게도 그는 이런 어리석은 믿음을 회개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그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이 메시지를 기록하는 동안 그는 최근에 에이즈로 병상에 누웠고, 하나님께 기회를 달라고 간구했다. 그는 마음을 주님께 돌이켰다. 그는 마음을 바꿔, 지옥행 길에서 돌아서기를 원했고, 감사하게도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했다. 나의 형제는 기회를 받았다. 그는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

25.6. 교만한 크리스천

잘 들으세요. 저 또한 복음주의 크리스천입니다. 제가 병자를위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치유해 주셨고, 제가 장애자를 위해 기도하면 주님이 고쳐주셨습니다. 나는 마귀를 내쫓고 새 방언을 말했지만, 나는 교만의 영을 갖고서는 목사를 영적으로 나보다 더 작다고 생각했다.

나의 목사보다 내가 더 많은 기적을 일으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 기적들을 내가 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교만심 때문에, 나는 대단한 재능이 있는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자비였다는것을 알지 못했다.

내가 지옥에 갔을때, 하나님은 나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교만한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제단 앞에서 교만과 허영에 가득차 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많은 사람들이 교만으로 가득차기 시작한다.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그들 자신이 몹시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합니까?

구제 사역하는 많은 사람들이 또한 교만으로 가득차기 시작합니까?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보고 계시며, 당신의 마음을 아신다고, 저는 당신에게 말씀드리기 원합니다.

만약 당신의 마음에 허영, 교만, 거만함이 있다면, 만약 당신이 당신의 형제나 목사를 업신여긴다면, 신속히 당신의 죄를 회개하세요!

주님 앞에서 수치를 당하는 것보다,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제가 지옥을 본 것처럼 당신도 똑같이 보기를 원합니다.

제가 느꼈던 두려움과 저주받은 울부짖음, 심판받는 것을 당신도 듣고 볼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해할 것입니다.

어떤 대기실 같은 곳까지 계속 걸어갔습니다. 소리치고 있는 마귀와 다른 마귀들이 자신들을 나타내 보이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귀 두 명이 아름다운 여자의 형태로 있었습니다. 그들의 임무는 목회를 파괴하고, 목사들을 죄짓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자들은 사탄의 함정에 주의해야 합니다. 사탄은 당신의 삶을 파괴하기 원하며, 당신과 가까운 사람들을 사용하고, 그리고, 예수님과 동행하지 않는 사람들을 사용할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탄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사탄은 사람으로 변장하는 마귀들을 데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로 들어가 젊은 아가씨들과 주부를 꾀어 죄짓게하고, 결혼과 삶을 파괴하려고 합니다.

지옥에서, 성령님을 거역하는 성령훼방죄을 지은 남자를 보았습니다. (누가복음 12:10) 거기에서 그는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며 자비를 간구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얼굴과 온 몸에 벌레들이 있었습니다. 벌레들을 제거할려고 했으나 더 많이 생겼습니다. (마가복음 9:44)

고통은 견딜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남자는 그의 가족이 거기에 올지,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진실로 당신의 가족을 사랑한다면,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서 지옥행이 안되도록 하세요 (사도행전 16:31)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마태복음 10:28)

크리스천들이 목사, 집사, 장로, 신자들로부터 진실을 숨길수 있다 하더라도 주님 앞에서는 숨길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시편 139:7-10)

25.7. 하나님께 거짓말하는 것

미친 소리같이 들립니다만, 많은 크리스천들이 거짓말 때문에 지옥에 떨어집니다. 크리스천들이 종종 교회에서 무심하게 거짓말을 하고 아무렇지 않게 생각합니다.

목사가 교인에게 질문을 하고, 답변으로 거짓말을 한다면,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간단한 거짓말에 하나님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도록하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5:3-10)

많은 크리스천들이 지옥에 있는데, 그들이 간단한 거짓말을 목사에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거짓말하고 있었던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술취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음행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요한계시록 12:8), (고린도전서 6:9-10)

당신은 크리스천이라고 주장하면서도, 계속 죄를 짓는다면, 하나님 앞에 더러운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에게 쓰임받고 있지만, 제 마음에 여전히 교만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7:21-23) 회개하고 마음과 생각을 새롭게 할 시간이 앞에 놓여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미지근한 크리스천, 실족한 크리스천 또는 이중생활을 하는 크리스천이라면 바로 지금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용서해달라고 간구하고, 악한 행실에서 돌이키십시오.

만약 당신이 예수님을 모른다면, 지금 기도하고, 주님께 용서를 구하고, 주님이 당신 마음으로 들어와 주시기를 청하고,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하세요.

시간을 허비하지 마세요

지옥에 떨어지는 크리스천이 되지 마세요